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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스토리 8 - 086 - 미뤘던 감정숙제

by 배져니






1


내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의 약점이 있는데,

그건 난도 높은 상황을 잘 대처해놓고 얼마 후에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난도 높은 상황이라는 게, 대충 눈치챘겠지만 대략, 스트레스 상황일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대처하는 나의 태도와 의도가 바른 편이어서

그 불쾌한 상황을 잘 대응,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의도가 바르니까 도와주는 사람도 꽤 계셨기에 도움도 받았고 말이다.




2


그런가 하면 내가 평소에 말이 없다시피 하다가

막상 언쟁이 일어나면 말수가 생겨나면서 할 말을 따박따박 내뱉고

그럴 경우 거의 이긴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언변을 그 사람이 알아내준 것이긴 하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근데 그 지인이 난감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어떤 여자'사업자 분과 사업 계약을 끊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내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나요?"라고 물어서

나는 "모르겠다."라고, "대충 싸움해서 안 보면 되지 않나요?"라고 했다.

한마디로 나는 '싸우고 사이 틀어지세요.'라고 농담처럼 한 말인데

어느 날 그 지인은 나를 불러내더니만 어느 여자분이랑 맞닥뜨려놨다.

보아하니 바로 그 '어떤 여자'이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싸움을 붙였다, 여자분과 나를, 그 지인이.


그 지인이 그 여자분이랑 나를, 생전 처음 보는 그녀와 나를 싸움붙였다.

싸움붙이는 기술이 오묘해서 초반엔 눈치도 못 챘고,

내가 눈치챘을 때에는 그 여자분이 이미 화가 나셔서

나에게 한참 시비를 걸고 있었다.

정말 그리 대단치 않은 이유로 언쟁은 일어나고 말았으며,

그녀는 쉽게 불이 붙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이겼다.

내가 말을 잘해서라기보다, 그녀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내심, '이렇게 감정적이고 논리 없는 사람이니

사업을 같이 하고 싶지는 않았겠구나...'


...라고 이해는 되었지만,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자기 일에 왜 날 이용하느냔 말이다.

그것도 내가 중차대한 과정에서 중재 역할도 아니고,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도 애매한...

부탁을 받거나 의뢰를 받거나 그런 게 아니라 불려 나와서

다짜고짜 말싸움해야 하는... 그것도 한 50명 보는 앞에서...


그 지인은 목적을 이뤘다.

여자가 빈정 상해서 계약 안 한다고 한 모양이다.

나, 내향성 인간인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겼다고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싸워서 스트레스받는 게 싫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신뢰를 보내고 싶었던 사람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적이어서 그날의 일은 잊었다.


이 지인에게 다른 한 번은


'이런 방법을 쓴다고? 이런 방법에 날 동원한다고?'


...라고 생각할 정도의 일을 겪었다.

이용당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는데

너무 황망해서 외려 아무것도 못하고

그날 저녁은 멍하니 한참 책상앞에 앉아있었던 것 같다.

괴로운 마음은 망각 시스템을 작동해버렸다.

그때의 일도 괴로워서 잊었다.

잊기 직전의 생각은 '세상에 믿을 "건" 없지...'였던 것 같다.




3


잊는다고 싹 다 잊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언뜻 기억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중에 생각하자....'라고 미루면서

다시 망각 상태가 되곤 했다.


'내가 아직 여려서...

내가 아직 심성이 강하지 못해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모진 일 같아서...

나는 지금 이런 일들을 처리할 정도로는 여물지 못해서....

그러니 나중에 생각하자....'


그렇게 미뤘었다.




4


작년부터 뭔가 달라지고 있다.

망각 상태였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꺼내어지고 있고

언뜻 기억나던 것들이 이제는 또렷이 기억나고 있으며

또한 기억이 떠올라도 상황의 당시만큼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사건들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지만

진짜 잊고 싶었던 것은 감정이었다.

나는 사건보다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버거운 느낌에서 마냥 도망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지,

나는 하나뿐인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주인공인데,

자꾸 극적 사건이 일어나는 걸 무서워하고

색다른 감정들이 겁나서 버리려고만 한 건 아니었는지...




5


잊힌 기억들이 힘든 감정의 일들이어서

기억이 되살려지기 시작하니 감정의 폭풍을 맞이하고 있다.

미뤘던 방학 숙제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미뤘던 감정 숙제는 버겁기 그지없다.

어지럽고 정신이 혼란스럽기는 한데...

지금이 더 사람답게 살아있는 것 같아서

나는... 엄살이 아니라 진짜..., 힘들어서 좋다고는 못하겠다.

그저 지금이 좋다기 보다.... 지금이 낫다.

희락의 감정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노애의 감정도 수긍해야 하고,

감정이 4개뿐이겠는가, 별의별 감정들을

'다 내 꺼.'라고 생각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럼 힘들어도 지금이... 낫다... 고 생각 할 수 있다.

내가 누리고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면적이 넓어졌으므로

나라는 사람됨의 폭도 커졌다고 추정할 수 있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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