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이라 잠이 쏟아진다.
외출 일정을 2시간 남겨두고 약간 피곤해서
잠시 잠깐 방바닥에 기댄다는 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져니야, 너 나간다면서? 져니야?"
퍼뜩 깨어나니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놀라서 시계를 보고, 다행히 약속이 깨질 지경은 아닌 터라
서둘러서 화장하고, 옷 갈아입고… 마구 준비했다.
내 방문을 닫고 마지막으로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자니
저쪽 현관에서 아버지가 신발장 안의 내 신발을 꺼내어
문 발치에 놓아주시는 게 보였다.
잠도 덜 깨고, 서두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허리를 굽혀 신발을 놓아두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와 박혔다.
2
늘 좋은 아버지이셨다.
요즘은 아버지께서 '다정함'을 탑재하고 계신다.
과자를 툭, 방에 넣어주시고 가신다거나,
식사 때 생선은 가시 없는 쪽을 남겨두신다거나,
따뜻한 물이 몸에 좋다고 당부하신다거나,
이번처럼 신을 꺼내 놓아주신다거나.
3
어릴 적엔 늘 바쁘시고 바깥일을 하시느라
별달리 대화를 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뭔가 비용이 필요해서 요청드리면
다음날에는 책상 위에 지폐가 늘 놓여있었다.
어떤 때에도 돈을 요청할 때 안 주신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그게 감사한 줄도 잘 몰랐다.
너무 대화가 없고 오붓한 가족의 모임이 없었고,
늘 아버지는 바깥일로만 바쁘셔서 집에 안 계셨으므로,
한때는 아버지를 가족의 '가장'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불충하게도, 생계를 유지해 주는 'ATM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4
며칠 전에는 외출하려는 내게
"현금은 있냐?"
…라고 물으셔서 나를 먹먹하게 하셨다.
요즘이야 카드 결제로 돌아가는 세상이라서 딱히 현금이 필요 없기는 하다.
아버지는 수중에 늘 비상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
얼마 전 현금을 다 소진한 내 사정을 기억하셨다가 챙겨주려 하시는 거였다.
아버지가 물으시기 직전에, 내가 뭘 막 준비하고 신경 쓰느라 예민해지고 있었다.
마침, 그때 아버지가 말을 거셔서, 심정상 심통이 나고 뾰로통해지려는 중이라서
나의 말이 곱게 나가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말을 거신 이유가 '현금 있냐'라고, 비상금 걱정을 해주시는 터라 심정이 먹먹했다.
'이렇게 내 생각을 해주시는데, 내가 자칫 불손하게 굴 뻔했구나…'
...싶으니, 심정이 식겁하고 죄송스럽고 새삼 아버지의 마음 씀에 먹먹해졌다.
5
요즘 찬찬히 아버지를 살펴보면,
젊으실 때는 대인관계를 안 하실 수 없어서,
그게 곧 업무와 관계가 있어서 소홀히 할 수 없으셨던 것 같다.
결코 가정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업무상 가정사를 다 챙기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내가 학창 시절, 책값이며, 학원비를 요청했을 때,
혹은 그 어느 때건 간에, 분명 어느 한때는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힘드셨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집안 사정은 굶고 살지는 않았으나 또 사치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빤히 아는 그 형편에도, 공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라면 거침없이,
그것도 한 번을 거르지 않고 늘 내어주신 것은, 풍요로워서가 아니라
부모님께서 허리띠를 졸라매셨을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직설적이고 감정 표현이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퇴임하시고 집에 계시게 되자…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성격이나 인간적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나의 많은 장점을 아버지께 물려받았다는 것도 알았다.
재치, 지적 욕구, 세심함, 그리고 이번에 발견한 다정함까지...
그런 사랑스러운 분을 'ATM기'로 치부했었던 한때의 내가 너무 부끄럽다.
아직도 아버지는 당신이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젊을 적엔 경제적인 부분을 채워주시더니,
여전히 현재도 비상금을 채워주려 하시고,
또 지금은 정말 정서적인 부분을 채워주시고 있다.
아버지가 허리를 구부려 내 신발을 가지런히 곱게 놓아주시던 그 모습이,
영원히 내 뇌에 각인되길 바란다, 딸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치는 너무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6
아버지, 제가 아부지 사랑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