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17
1
어머니가 나와 아버지를 거실로 불러내셨다.
바닥에 깔개를 깔고 쪽파 세단을 늘어놓고 계셨다.
"파김치 해야 하니까, 파 좀 다듬어들."
나야 집에서 서열 4위이니까 파 다듬는 게 당연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머니랑 서열 1, 2위를 다투는 세력가이신데?
의외로 아버지는 반발하시지 않고 어머니의 말씀에 따랐다.
속으로 '아버지가 많이 가정적으로 되셨네' 싶었다.
셋은 둘러앉아 쪽파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파가 아니라 쪽파였다.
까도 까도 얇은 쪽파가 계속 나왔고 자잘한 쪽파가 너무 많아서 손도 많이 갔으나 다듬어 쌓아올리는 양적인 면에서는 느는 것이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가 투덜거리신다.
"원래 파김치는 대파로 해야 하는데.... 익었을 때 대파가 씹는 맛도 있지 쪽파는 얇아서 익으면 흐물흐물하다고......"
나는 파김치를 안 먹기 때문에 그냥 파김치는 파로만 만들면 되는 줄 알았다.
아버지의 파김치에 대한 일가견이 신기했다.
어머니는 "맛있게 해주려고 샀는데 그렇게 말하니 괜히 샀나 싶네..."라고 살짝 서운함을 토로하셨다.
그 후엔 아버지는 별 말씀 안 하시고 끝까지 파를 다듬으셨다.
2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아침 일찍 일어나셨나 보다. 혼자 분주히 양념을 만들으신 후 파를 버무리고 계셨다. 그러나 시간 계산에 실패하셔서 아침 식사가 늦어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좀 답답하신 것 같았다. 아침이면 일정한 시간에 등산을 나가시는데 이렇게 늦어지는 날이면 조금 기분이 안 좋아지시곤 했다. 늦어지는 아침밥 때문에 가끔은 언쟁을 벌이시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보아하니 어머니는 아침 식사에 갓 무친 파김치를 올려놓고 싶으신 모양이었는데 시간이 늦어지자 좀 당황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러다 언쟁하시는 거 아닐까 긴장하며 아버지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머니도 아버지의 바쁜 마음을, 두 분은 서로를 알고 계셨다. 아버지는 별말씀 없이 스스로 밥을 푸시고 대충 반찬 몇 가지로 식사를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얼른 무쳐놓은 쪽의 파김치를 덜어내어 아버지 앞에 놓아주셨다.
아버지는 식사를 끝내시고 등산을 가셨고 어머니는 파김치를 김치통에 넣으시며 정리를 하셨다.
그렇게 별일 없이 끝났다.
그저 그 상황을 보고 있던 나만 조마조마했을 뿐.
3
투덜거리시는 아버지를 대응하는 어머니의 방식,
늦은 아침밥의 어머니를 대응하는 아버지의 방식.
예전보다 많이 둥글러지셨다.
그걸 느끼는 나는 마냥 흐뭇하다.
4
내 기억으로는 스스로 파김치를 먹은 적이 없다.
그날 아침에 조심스레 시도해 먹어본 파김치는 맛있었다.
식성의 영역이 넓어졌다.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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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냐이다.
- 레프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