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하는 수밖에

시즌5-019

by 배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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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독서 과정에는 좀 나쁜 습관이 들여져 있다.

낭독보다 묵독이 아무래도 좀 빠르다. 소리를 내는 속도보다 눈으로 읽는 속도가 더 재빠르니까 말이다. 눈으로 훑어가며 읽다가 어느 순간 글이 좀 지루하다 싶으면 더 빠르게 훑어가는데 그 과정에서 건너뛰는 단어와 문장들이 생기곤 한다.

성실한 독자였을 때에는 좀 허투루 읽었다 싶으면 되돌아가서 다시 읽어내렸는데, 이제 나는 건달 독자가 되어버려서 건너뛰면 그냥 건너뛰는 대로 내버려 두고 다음 문장을 읽어내려 간다.

뭐 그렇게 읽어도 대략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책의 저자가 글안에 이러저러한 구성과 장치를 밀도 있고 세밀하게 해 넣은 경우, 건너뛰어 읽는 것은 좀 난감한 상황을 불러일으킨다.

웃어야 할 때 웃지를 못하는 경우나, 기발한 반전이라고들 하는데 왜 그런지 이해를 못할 때가 생기는 것이다. 건너뛰었던 부분에 실마리가 될만한 힌트가 들어가 있을 때가 그러하다.



이 나쁜 습관을 고쳐야 하는데 쉬이 고쳐지지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수능 언어 시험을 대비해 여러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었는데, 언어 문제들이 다 그렇듯 지문이 길었다. 문제를 다 풀려면 지문을 빠르게 읽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이면 빠르게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속독의 방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들은 속독의 방법은, 지문을 대각선으로 훑어내려가며 대략의 글씨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실제 적용해봤더니 완벽한 만족은 아니지만 조금 빨라지는 효과를 느끼긴 했었다. 그리고 수능 언어영역의 지문들을 다 읽고 문제도 끝까지 다 풀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 어중간하게 익힌 속독법이 지금 독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무슨 책을 보던 스윽, 휙 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진득하게 천천히 읽으면서 곱씹어 생각해가는 걸 생략하게 되더라. 책은 그냥 스윽, 휙 보고 끝이었다.








2


그러하던 내가 요즘 조금은 차분하게 활자들을 읽어내려간다.

수업의 숙제로 읽어가야 하는 글들에 대해 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글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해야만 했다. 습관적으로 훑어읽다가 아차 싶으면 뛰어넘은 곳으로 가서 다시 읽었다. 끝까지 다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된다 싶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또다시 읽고 말이다.

그렇게 2번 이상을 보고도 이해가 안 가면 평을 쓰면서 다시 꼼꼼히 본다. 최소 2번, 많으면 4번 정도 보는 것 같다. 이게 반복되니 지친다. 그래서 애초부터 단번에 이해하자는 마음으로 찬찬히 읽었다. 또 읽을 때 눈으로 글씨를 찍어내린다는 느낌으로 한 자 한 자마다 눈길을 가닿아 박았다.

힘들지만 그렇게 읽으니까 내용 파악이 좀 되더라.

천천한 독서 때문인지 아니면 평을 적으면서 자연스레 머릿속 정리가 되어서인지, 그렇게 바라던 대로 곱씹어 생각하는 횟수도 조금 증가한 것 같다.






3


아직 완전히 별로인 습관을 없애진 못했다.

그래도 1년 동안 수업을 받으면서 훈련했더니 나쁜 습관이 한 발 물러선 것 같다.

나쁜 습관은 반복으로 몸에 배게 된다. 좋은 습관도 반복으로 몸에 배게 될 것이다.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매주 조금씩 천천히 읽어내려가며 독서 습관을 만들어나가야겠다.




4


그러기 위해서 다음 학기에도 지금 수강한 이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 등록 경쟁이 심해서... 잘 돼야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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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울한 생각의 공격을 받을 때

내 책에 달려가는 일처럼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책은 나를 빨아들이고 마음의 먹구름을 지워준다.


-미셸 드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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