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성모가 그립다.

나는 가끔씩 그날의 조성모를 그리워한다.

by 삐딱한딴따라

2000년 서울,


서울에서 일하는 여자 친구와 달달한 데이트를 끝내야 할 시간이 왔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 다가올 즈음 머릿속에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린다.


“자기야 우리 오늘...”

음흉한 상상을 실행하기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용기가 나질 않는다.


“막차 시간이 11시니까 여기서 10시쯤 헤어지면 될 것 같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엔 그녀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너무 뜨겁다.


일단, 뒷 일은 모르겠고 일분, 일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여자 친구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여자 친구는 지방에서 상경한 여성 직장인을 위한 기숙사 개념의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다. 이곳은 대학 기숙사처럼 차라리 외박은 가능해도 귀가시간은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직장인들에게 꼭 이래야 했나 싶다)


집 앞에 도착하니 이색적인 장관이 펼쳐졌다.

미혼여성들만 사는 아파트 단지다 보니 아파트 입구에서 수많은 커플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통금시간 목전까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오빠 근데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남자들은 다 방법이 있어 걱정하지 마”

방법은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나는 근거 없는 철딱서니 허세를 부리고는 있었고 그 단순한 머릿속에는 고민도, 걱정도, 방법도 없고 그냥 지금 내 앞의 그녀만 있었던 거다.


그런 애타는 마음을 알았는지 돌아갈 시간이 되자 그녀는 두 팔을 벌리더니 주저하던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꼬옥 안고 교제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물론, 나를 포함한 수십 쌍의 커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딱 거기까지였다. 아쉽지만......


그녀를 보내고 돌아가는 길,

수십 명의 청년들이 지하철로 발길을 향하고 있었다. 상당히 의외였던 건 그들의 표정과 행동이었다.

설레는 데이트를 끝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마치 격렬한 전투를 끝내고 온 듯 그리 가볍지 않아 보였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해서였는지, 아니면 나처럼 이제 집으로 돌아갈 현실이 막막했는지 설렘과 애정이 드러나는 모습은 아니었다. 어쩌면 약간의 긴장이 풀어진 여유로움 일수도 있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 놓인 막막한 현실이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는 이미 떠나버렸다.


아직은 대학생 신분이던 나에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거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는 호사는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았다. 대책 없이 서울역에 도착한 나는 대합실에서 쭈그려 앉아 아침을 맞아볼 요량이었으나 이마저도 예상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막차가 떠난 이후 첫차 출발시간까지 역사 출입을 아예 막고 있었다.

전혀 예상을 못했다. 이제껏 기차를 안타 본건 아니었으나 막차시간 이후의 서울역을 본 기억이 없었고 어찌 운영되는지 들어본 기억도 없었다. 영화에서 보면 기차역이나 터미널 대합실 쭈그려 잠을 자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늘상 나오길래 어디고 그냥 그런 줄만 알았다.


서울역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설상가상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리는 비를 피해 서울역 입구 처마 아래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피할 곳도 갈 곳도 없었다.


네온사인만 켜진 서울역 입구 호두과자 상점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서울역에 도착할 때부터 이미 들려지던 음악이었지만 이제야 그 소리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괜찮은 거니 어떻게 지내는 거야 나 없다고 또 울고 그러진 않니...”

점장님께서 조성모의 팬이었는지 조성모의 히트곡만 하릴없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쭈그려 앉아 음악을 듣는 일뿐인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커다란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더욱 서정적이었다.

장대 같은 비 덕택에 혼자만의 음악 감상을 훼방 놓는 사람들도 없었고 역 광장 주변을 지나는 차 소리도 빗소리와 음악소리에 묘하게 섞여 전혀 이질감 없이 오로지 나를 위해 연주하는 고급스러운 음악 같았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아마도 나의 안전한 귀가를 걱정하는 전화일 테다.

'여보세요, 나 지금 출발해 걱정 말고 얼른 자... 내일 아침에 전화할게, 아침에 출근 잘하고.... 오늘 고마워..."

아주 간단히 안부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의 이 상황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즐기고 싶은 마음에 오늘의 히로인(heroine)을 퇴장시키고 줌 아웃과 동시에 BGM의 볼륨을 높였다. 아주 크게......


"눈물 흘린 거니 내 품에 안은 니 사진이 젖었어 왜 좋은 날에 울어 너까지이제 마지막 니 소원이었었잖아..."


아름다웠던 하루,

애틋한 아쉬움과 설렘,

빗소리에 어우러진 애절한 노랫소리,

두근거리는 청춘의 나를 에워싸고 함께 두근거리다가 새벽을 맞이 한다.

그리곤 격렬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뜨거운 그것을 안고 고향으로 향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내 곁을 떠나간 이후 나는 조성모의 음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그날의 기억이 오롯이 예쁜 추억으로만 새겨진 이후,

나는 가끔씩 그날의 조성모를 그리워한다.


또 십수 년이 흐른 후 나는 어떤 조성모를 그리워하게 될까?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그를 만나며 그리워하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


154945264_778259736144960_5978172152403063729_n.jpg 그림 협찬: 짱새(https://www.instagram.com/semi_j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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