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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경미 Nov 10. 2022

가난한 주인공은 싫어

허구 속 아이라도 힘든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모든 쓰레기통은 주인의 갈망을 담고 있다. 복숭아 향이 나는, 아기자기한 화장품 포장지가 가득 담긴 쓰레기통에는 하루라도 빨리 신비로운 여성이 되고 싶은 어느 소녀의 갈망이 들어있고, 초콜릿과 과자봉지가 가득한 쓰레기통의 주인은, 호기롭게 시작한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결국 쪼그라든 위장이 보내는 본능적인 갈망에 패배한 사람일 것이다. 내 쓰레기통은 어떤 욕구를 숨겨놓고 있을까. 난도질 된 쿠팡 포장 봉투와 하얀 뽁뽁이가 숨 쉴 틈 없이 서로를 꽉 부둥켜안고 있는 걸 보면 어떤 욕망을 과소비하는 중임이 틀림없다. 무엇을 이리 잔뜩 샀을까. 퍼진 살을 조여줄 보정속옷? 운동기구? 아니다. 내가 요즘 무지막지하게 사들이고 있는 것은 ‘동화책’이다. 요즘 동화를 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우고 있다. 평소 읽지도 않던 동화책을 밀린 숙제하듯 읽고 있으니 나도, 쓰레기통도 과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동화 속의 기상천외한 상황과 반전은 어떤 영화보다 강렬했다. 희부연 안개 속에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슬픔에 차마 책을 덮지 못하고 생각에 잠기다가 눈물을 쏟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참 전에 어른이 된 내가 동화를 읽으며 온화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도 그 작가들처럼 좋은 동화를 쓸 수 있을까. 내 안의 강한 욕구가 밤잠을 설치게 했다. 

서사를 위해 내가 만든 주인공은 하나같이 부잣집 아이였다. 조연들도 마찬가지였다. 불쌍한 인물은 싫었다. 반드시 부족함이 없는 아이, 사랑받는 아이여야 했다. 가난한 주인공에 관해 쓰려고 하면, 아직 다 써 내려가지 않은 빈 여백이 스케치북이 되어 잠가둔 내 어린 날의 기억을 끄집어내 생생히 재연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내 어린 시절을 닮은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아. 허구 속 아이라도 그런 힘든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빨간 벽돌집 앞 어린 내가 다 큰 나에게 엉겨 붙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동화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서사를 읽다 보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지다가도, 삼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아직도 아이들에게 그런 어려움을 주는 어른이 있는 게 진절머리 나게 싫다. 동화 속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동화의 결말이 상처의 회복이든, 한 걸음 나가는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든. 있지도 않은 책장을 넘어 상상해본 그 아이들의 현실은 사랑하는 할머니는 언젠가 죽을 것이며, 가난한 부모가 갑자기 부자가 될 리 없고, 이혼한 부모가 서로를 사랑할 리 없고, 죽은 엄마가 다시 돌아올 리 없을 것이다. 결말의 회복은 잠시뿐, 아이들에게 남겨진 수많은 숙제는 이제 시작된다는 생각에 마지막 장을 쉬이 덮을 수 없다. 오래전 개그맨 박경림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방문을 열면 바로 다른 집 방문이 보였다고 하는 걸 보면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것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말을 잘하는 것은 여러 집이 모여 살았던 그 환경 때문이라는 그녀의 긍정적 사고방식이 나를 놀라게 했다. 같은 처지에서도 다르게 자란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화 속 아이들도 그랬으면. 자신의 삶을 잘 견디고 본연의 자기 존재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좋은 환경을 어른들이 만들어줘야 한다는 책임의식, 어린이는 환하게 빛나야 한다는 존재의식, 그리고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아이들을 인식하는 한 나의 동화 쓰기는 한계가 뚜렷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 연민이 치덕치덕 붙은 나 같은 어른이 동화를 쓸 자격이 있을지 고민하는 요즘이다.이제 막 불거진 꽃망울이, 찬란히 먼저 핀 꽃들을 질투하듯 이제 쓰기 시작한 동화를 수십 년 쓴 작가의 글과 비교하며 좌절에 빠졌었다. 하지만 이제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도달했다. 나는 왜 꽃망울을 피우고 싶은가. 누구를 위해 글을 쓰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내 동화가 어쭙잖은 위로를 주면 어쩌나. 안쓰러운 주인공의 서사를 병풍 삼아 나의 갈망을 채우려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내 쓰레기통 안이 언제까지 회색 포장비닐과 하얀 뽁뽁이로 가득 찰지 알 수 없다. 꽉 찬 쓰레기통이 비워지고 또 다른 갈망이 그곳을 채우기 전에 내 안의 주제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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