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_ [자아 표류기] 생애 첫 정신과 방문기
여러 해 전. 생전 처음 간 정신과는 생각보다 허름했다. 흰색이었던 것 같은 흰색 벽지. 틈새 사이사이까지 때가 끼인듯한 어두운 세피아 데스크. 기분을 더 칙칙하게 만드는 쥐색 대기 의자. 나보다 더 수심 가득 찬 듯 보이는 대기실 인테리어는 정신과에 대한 적잖은 호기심을 반감시키기에 충분했다. 접수처는 어수선하고 직원들은 냉랭했다. 대기자들의 표정은 무색이었다. 참 수상쩍은 분위기다.
전날 오후.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다시 찾아보는 대신 정신과를 검색하고 있었다. 자살이라는 단어는 왜인지 검색 하기엔 부담스러운 단어다. 실행하기도, 알아보기도 용기가 필요한 단어.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것만 같고 도움을 준답시고 반갑지 않은 전화벨이 울릴 것 같다.
묘한 긴장감을 이겨내고 그 단어를 검색하면 더없이 기쁘게도 세상은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움받으세요. 자살예방 상담전화 1363'이라는 메시지가 응당 자신의 자리가 거기인 듯 상단에 배치되어있고, 그다음은 학생상담센터, 자살예방정책위원회, 보건복지부 등 눌러보고 싶지도 않은 사이트들의 나열, 더 페이지를 내려가 보면 자살취약계층의 심리, 자살생각에 대한 연구 등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학술논문들이 그들의 지식을 뽐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 결국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극복, 공감, 위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한번도 느꼈을리 없는 정상인들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꽁꽁 숨겨놓았다. 어느 음침한 곳을 뒤지면 찾을 수 있을 테지만 그만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알지 못하게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정상인들의 판단이 나보다 낫겠지.
몇 군데 전화를 건다. 황당하다. 예약을 일주일 씩이나 기다리라니 제정신인가. 아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건가. 더더욱 조바심이 난다. 당장 아무 곳이나 가야겠다. 정신과가 다 거기서 거기지
"어떤 일로 오셨죠?"
습관적 평온함을 장착한 여성이 무뚝뚝한 어투로 묻는다. 단발머리에 힘없는 어깨, 일에 대한 흥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과 의사는 하필 나와 비슷한 연령대이다. 자존심이 상한다. 무척 상한다. '당신은 운 좋게 잘 사는 집에 태어나서 각종 과외를 받으며 좋은 대학에 진학했을 것이고, 사명이었을지, 편해 보여서 선택했을지 모르는 정신과 전문의가 되어서 사람들의 따분한 얘기에 대꾸 몇 마디 해주고는 약을 처방하며 돈을 벌겠지..' 사실은 아무 잘못 없는 이 정신과 전문의는 대답 없는 나에게 재차 묻는다. "말씀해 보세요. 어떤 것이 힘들어서 오셨죠?" 자존심을 거두고 겨우 말을 뱉어낸다. 죽고 싶다고.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고. 그래도 그녀는 의사니까.
의사 : 남편에게 그런 부분을 말씀해 보셨나요?
나 : 네. 하지만 남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얼마나 힘든지 알지 못해요.
의사 : 지금처럼 말씀하시나요? 남편에게?
나 : 지금처럼요? 지금 제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데요?
의사 : 웃으면서요..
정신과 전문의를 비아냥대기 위해 미소를 머금으며 얘기한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하는 얘기가 얼마나 끔찍한 얘기인지 알고 있지 못하다. 여기에 있는 자신이 드라마 주인공이 된 듯 낯설고 신기해서인지, '자살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감사하게도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살려고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에 내성이 생겨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마음에 확실히 병이 생긴 게 분명했다.
상담은 계속 진행되었다. "전 밥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 같아요. 살림을 한다는 것. 그것은 힘들기만 하고, 가치가 없는 일이에요." 평소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멋진 밥상을 차렸다고 해서, 집안이 깨끗하다고 해서, 도대체 누가 칭찬해준단 말인가? 당연한 일을 잘하는 것은 의미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맹목적인 칭찬을 해 주는 '일' 그것만이 가치 있다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묻는다. "그것이 힘들고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그럼 그 일은 누가 하나요?" 나를 가리키려 드는 것 같아 언짢은 나의 기분은 무시한 체 의사는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의사 : 무엇이 알고 싶어서 여기에 오신 거죠?
나 : 저의 병명을 정확히 알고 싶어요. 강박증이라느니, 우울증이라느니 그런 정확한 병명이요.
의사 : 그것이 중요한까요? 당신은 상담이 필요해요. 약 처방도 필요하고요.
나 : 제가 심각한 수준인가요? 잠깐 상담한 것뿐인데 어떻게 판단하시죠?
의사 : 죽고 싶다고 하신 것 아니세요?
나 : 네 그렇죠.
의사 : 자살하겠다고 하는 것 이상 더 심각한 것이 또 있을까요?
나 : ...
흰 봉투의 약봉지를 받아 들었다. 흔한 감기약이 아니다.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으니 정말 정신병 환자라도 된 기분이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제야 살만해졌는데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이곳에 오면 좀 더 거룩한 그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인정만을 갈구하는 민낯만을 대면했을 뿐이다.
집으로 가는 길. 그 갈망이 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쳇. 형편없다. 다음 진료일을 기계적으로 예약해 놓았지만 다시 그곳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과는 전혀 신비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