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수 없는 정처없는 시선.
무심한 듯 베어문 담배.
피코트의 두께감이 강인한 느낌을 주지만, 한껏 세워올린 옷깃때문인지 연약함이 느껴진다.
카뮈를 흔히 부조리의 대가, 허무주의 작가로 부르는 이유를 이 사진 한 장으로 알 수 있다.
누구나 살면서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적응하거나 부유하거나.
타의에 의해 부유함을 당하는 기분은 그리 썩 좋지 않다.
하지만 자의로 부유할때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는 사람들을 먼 발치에서 보는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이방인'
그래서인지 누구나 이 제목을 들으면 한번쯤은 책표지를 넘기게 만든다.
카뮈는 그런 힘이 있다.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당신은 젊으니까 당신과 함께 살았으면 아무래도 적적하셨을 겁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집에 있었을때, 엄마는 아무 말없이 나를 지켜보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양로원으로 들어가고 난 다음 처음 며칠 동안은 자주 울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습관 탓이었다. 몇 달 후에는 양로원에서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더라도 역시 습관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마지막 해에 내가 거의 양로원에 가지 않은 데이는 그러한 이유도 약간 있었다. 게다가 그러자면 또 일요일을 빼앗겨야 하기 때문이었다.-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표를 사 가지고 두 시간동안이나 차를 타야 하는 수고는 그만두고라도 말이다. -1부 11p
엄마의 시신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뫼르소.
그런 아들과 달리 엄마의 시신 앞에서 슬피 우는 지인.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신을 심판하는 듯 앉아있는 엄마의 지인들에게 불쾌감을 느낀다.
작열하는 태양, 그리고 살인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땅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을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엉을 덮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정당방위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재판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
연인이 있음에도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그리고 자신이 아랍인을 쏜 것이 태양때문이라고 말한 것 때문이었을까.
그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사형수가 된다.
때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사형수가 되어서야 비로소 현재의 삶, 행복을 깨닫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짧은 단편임에도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소시오패스인가
허무주의로 일관하는 비겁한 인간인가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가난한 지식인으로 펜으로 전쟁을 반대했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이기도 했다.
생애 대부분을 결핵과 싸워야했기에 그 누구보다 삶을 소중히 여겼다.
20세기 초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이념의 홍수시대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채 부유하던 수많은 사람들
산업화에 따른 생명경시와 자본주의의 성장은 부조리한 세상을 만들었고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삶을 찬양하는 방식을 오히려 죽음으로 역설하고자 했던 작가.
카뮈의 인터뷰 중 가장 <이방인>스러운 대답이 있다.
"당신은 좌파 지식인인가?"
-나는 내가 과연 지식인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 외에 나는 본의 아니게 좌파의 뜻과 관계없이 좌파를 지지한다.-
카뮈의 <이방인>을 이해하고 싶다면 <시지프 신화>를 추천한다.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만큼이나 어려운 책이지만
<이방인>의 해설서라 할만하다.
죽음 앞에서 삶을 찬양하는 것.
좀 더 카뮈의 가슴떨리는 문체를 즐기고자 한다면 <페스트>를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