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저항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정당한가

by 단상


하나의 전투, 끝나지 않는 분노:

저항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 불편한 민낯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Paul Thomas Anderson)


tempImagePavbIr.heic 출처: 나무위키

원배틀 애프터 어나더.


이 영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이 만들어서 유명하다고 한다.

난 못들어봤는데..

프로필을 찾아보니 스탠리 큐브릭과 비교되는 미국 영화의 구원자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단 유명한 감독이 만든 화제작이라고 해서, 쿠팡에서 11000원이라는 거금을 결제하고 시청했다.


줄거리 요약

앞 부분은 혁명 지하조직 프렌치 75 단원들의 저항 시위를 다루고 있다.

갇힌 난민들을 풀어주기 위해 수용소를 습격한 퍼피디아는 록조 대령(숀펜)과 마주하게 되고, 강인한 그의 정신을 타락시킨다.

몸도 마음도 강인한 군인임을 자부했던 록조는 퍼피디아와의 만남 이후 그녀를 집착하게 된다.

그러던 중 저항을 위해 건물에 폭탄을 설치하려던 퍼피디아를 뒤쫓아 정체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며 하루밤 밀회를 제안하고 퍼피디아가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미 밥 퍼거슨(디카프리오)와 연인 사이였던 퍼피디아가 갑자기 임신 후 출산을 하게 된다.

밥은 조직에서 떠나 가정을 유지하기를 원하지만 퍼피디아는 혁명을 위해 남편과 갓난 아기를 버리고 사라진다.

하지만 록조에게 잡히고 퍼피디아는 프렌치 75 조직원들을 밀고하고 빠져나온다. (이후 퍼피디아는 더이상 영화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퍼피디아의 밀고로 조직은 와해되고 밥과 어린 아기까지 위험에 처해지자 그는 멀리 떠난다.

16년 후, 퍼피디아의 아기는 어느덧 사춘기 소녀(윌라)가 되었다.

한편 록조는 백인우월주위성향의 권력가들 모임에 참여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퍼피디아의 하룻밤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 그 모임에 가입할 수 없다.

록조는 윌라가 자신의 아이임을 짐작하고 윌라의 소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국 윌라를 찾아내 친자확인검사를 한 결과 윌라가 그의 딸임을 알고 분노한다.

모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윌라를 처리해야만 한다. 사람을 시켜 처리를 부탁한다.

윌라는 엄마의 피를 물려받아 저항이 몸에 배어있는 소녀이다. 스스로 그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권력가들은 록조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를 처치한다.

밥은 딸이 납치된 이후 내내 딸을 구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딸이 스스로 위기에서 빠져나온 후에야 딸을 만난다.

-----------

사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꽤 긴 편이고 16년 이후의 상황은 약간 지루함도 있다. 게다가 퍼피디아가 임신한 상태에서 기관총을 쏘는 장면은 못내 불편하다. 하지만 밥 퍼거슨의 딸을 찾는 여정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

tempImageBYxoSC.heic

영화를 다보고 나니, 아마도 퍼피디아는 자신의 뱃 속 아기가 록조의 아이였음을 알았던 듯하다.


미국 영화의 구원자라는 닉네임에 걸맞는 명장면을 추천한다면 구불구불 하이웨이씬이다.

독창적이고 혁명적이다.


tempImageUH9xZT.heic

아이맥스용 포스터인데, 이 장면을 위해서라면 아이맥스로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계속 불편했다.

영화는 인종과 계급 차별에 대한 소수 집단의 끊임없는 저항을 다루지만,저항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폭발하는 분노, 그러나 전략 없는 폭력 (퍼피디아)


영화 속 퍼피디아의 모습은 가장 납득하기 힘들었던 지점이다. 그녀의 행동은 저항 운동이라기보다는, 억압에 대한 분노를 배설하듯 쏟아내는 즉흥적인 폭력처럼 보였다. 사상의 깊이나 체계적인 전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범죄 집단의 일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폭력적 저항의 가장 어둡고 비효율적인 단면을 의도적으로 비틀었다.

또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폭력 시위가 반복되는 현실은, 어쩌면 이 저항이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고 악순환에 갇혀버린 비극을 대변하는 것 아닐까?


문득 김훈의 <하얼빈>이 떠올랐다.

안중근은 무력 시위를 선택했지만 선의의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고민했고 무장폭도로 비춰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당시 한국의 독립 투쟁은 무력과 동시에 외교적 호소, 선별적인 의거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목적을 극대화했는데, 이 영화 속 폭력은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영웅적 서사를 거부한 찌질한 주인공 (디카프리오)

tempImage8rl7nD.heic


디카프리오의 캐릭터 역시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를 살짝 비틀었다.

정말 주인공답지 않은 캐릭터다.폭탄 제조 전문가로 활동했던 밥은 아이가 생기자마자 저항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혁명을 꿈꿨지만 조직에서 나와서는 평생 술과 마약에 의지해 사는 반(反)저항적인 삶을 살아간다.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들이 물리치고자 하는 권력가들을 이성적이고 차분하며 계획적인데, 이런 삶으로 어떻게 혁명을 꿈꿨단 말인가. 알고보면 감독이 안티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

폴토마스앤더슨은 권력가들을 조롱하는 대신 혁명가들을 조롱한다. 그래서 불편함은 계속된다.



단 한 번의 강렬한 만남. 록조는 왜 퍼피디아에게 집착한 걸까


퍼피디아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되지 않는 '분노와 폭력' 그 자체다.

반면 록조는 군부/경찰 세력의 상징으로서, 통제되지 않는 위협을 '개인적으로' 제압하고 소유함으로써 권력의 절대성을 입증하는 인물이다.

그의 집착은 곧 저항 세력의 핵심을 파괴하여 전체를 무력화하려는 권력의 전략을 상징힌다.


그런 록조에게 자신과 유사한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퍼피디아의 격렬한 폭력성은 곧 제압하고자하는 욕구를 느꼈을 것이다.

폭력의 에너지를 공유하는 기묘한 관계. 변태적이다.


그렇다면 퍼피디아가 안가에서 탈출한 후로 왜 그녀를 찾지 않고 윌라를 쫓은걸까.


록조에게 중요한 것은 저항이라는 위협 그 자체이다. 퍼피디아의 폭발적인 분노가 잠잠해지자, 그는 더 조직적이고 잠재적인 미래의 위협(윌라)을 찾아내야만 했다.


록조라는 캐릭터의 등장은 '하나의 전투가 끝났다고 착각하는 순간, 권력은 이미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록조는 억압의 시스템이 얼마나 영속적이고 기민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상징이다.


숀펜의 연기는 남우주연감이다. 명불허전.

tempImageVkirxI.heic


One Battle After Another...

이제는 진화해야 할 저항의 방식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관객에게 편안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폭력적 악순환을 끊고, 어떻게 저항의 방식을 진화시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강렬하게 던진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저항이란 단순히 분노를 배설하는 것을 넘어 전략과 지혜가 동반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폭력을 낳지 않는 폭력의 해결을 모색해야 함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이 영화는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한줄 감상평: 이 시대의 '저항'이 무엇인지를 비틀어서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적 '나쁜'영화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살아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