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할매>
'600년된 팽나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20대 시절 읽었던 마루야마 겐지의 <천년동안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무가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데 한 곳에 우두커니 서서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는 이야기가 꽤나 마음 깊이 남았고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늘 마음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여든 둘이라는 나이에 5년만에 다시 내는 황석영 작가의 신작이다.
60년 넘게 글을 써온 대가가 여든이 넘어 쓴 글을 과연 어떨까 너무 궁금했다.
<할매> 제목은 다소 올드하지만 과연 내공이 느껴지는 글이다.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은 책 초반부 별에 관한 이야기다.
별의 과학적 서사를 문학으로 풀어낸 작가님의 표현력.
경이롭다.
유성이란 아득한 하늘 속을 흘러 다니는 돌의 무리였다. 별들도 흐르는 강물처럼 길이 있어서 늘 다니던 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사방은 언제나 어두웠고 어쩌다 빛나는 거대한 별 근처를 지나갈 때는 그 빛을 받아 밝아지기도 했다. 가다가 다른 유성의 무리를 만나면 부딪치기도 하고 흐트러진 대열이 저희끼리 튕겨나가기도 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엇인가 엄청난 힘에 이끌려 떨어져 내리면서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었다.
열살 먹은 팽나무가 서 있는 숲속 빈터에 운석이 떨어진 것은 어느 여름 녹음이 무성할 때였으니 그 돌 조각은 지상의 나이로는 한살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캄캄한 하늘을 흘러다니던 이런 작은 운석이 지구라는 거대한 땅덩이와 같이 사십오억살이나 나이를 먹었다는 것도 사실이다.-p38-39
나는 요즘 지구 탄생 이야기, 양자역학, 양자 생물학에 관심이 생겼고 <코스모스><문과남자의 과학공부><박문호박사의 빅히스토리><생명, 경계에 서다:양자생물학의 시대가 온다>등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 만사의 이치를 이토록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다니, 책 초반부부터 감동이 밀려왔다.
책은 약 200페이지 분량이기에 하루만에 다 읽었다.
결론적으로는 마루야마 겐지 스타일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팽나무의 씨앗에 싹이 돋고 어린 나무에서 어른 나무가 되기까지 600년의 시간이 흐르는동안 여러 생명에 관한 이야기들이 시간순으로 나온다.
시베리아에서 남한으로 내려오는 개똥지빠귀 이야기, 3년을 물 속에서 애벌레로 살다가 드디어 지상으로 나와 짧으면 세 시간, 길면 하루 반나절을 살고 짝찟기가 끝난 뒤 죽는 하루살이 이야기, 그리고 조선시대,일제시대, 그리고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 이야기가 하제마을 팽나무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모든 만물의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가장 단적인 장면은 바로 신부가 오체투지를 할 때 아스팔트 바닥에서 발견한 다양한 주검들이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비에 젖은 길에서 무수한 생명들의 짓이겨진 시체를 보게 되는 일이었다. 트럭이 지나간 자리에 온 몸이 처참하게 짓이겨진 개구리의 주검들이 흩어져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작은 곤충부터 시작해서 도로의 옹벽에 가로막혀 차바퀴에 뭉개진 지렁이들에 이르기까지 차를 타고가면 볼 수 없는 주검들이 길 위에 가득했다. 길을 건너다 미처 피하지못한 고라니,노루, 달리는 차체에 부딪혀 떨어져 죽은 꿩,맷비둘기, 작은 새들까지 생생히 보였다. 인가가 가까운 도로에서는 개와 길고양이와 쥐의 뭉개진 주검들이 많았다. 엎드리면 사람도 미물임을 깨닫는다.
서울까지 팔백리 길을 육십오일동안 세 걸음 걷고 절하고 가면서 그드은 육신이 부서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뉘우침의 길이 되었다. 이게 다 이 시절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참회의 길이었다. 그들이 해창 갯벌을 떠날때 밝혔듯이 삼보 일배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려는 안간힘이었다.-p201
육십년을 작가로 글을 쓰면 이런 문장이 나오는구나.. 감탄을 하며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