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창고라도 붙여놔야 의사한테 간다.
반창고라도 붙여놔야 의사한테 가지
필자는 소규모 IT회사에 재직 중이다.
20년도 12월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일념 하나로 면접을 보러 다닌 결과 현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서울에 상경하고 맞이하게 된 두 번째 직장이기도 하고 처음 경험하던 회사 생활(개발자 생활)이었기에 어렵고도 힘든 일을 겪고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쌓으면서 회사를 다닌다는 것과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재미와 매력에 어느 순간 매료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애사심" 덕분인지 매일 출근하는 길이 나름의 기대감으로 채워졌으며 출근하고 나서 맞이하는 오전 시간에는 "오늘 하루는 어떤 일들을 처리할까"라는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었기에 하루 중 제일 가치 있는 시간으로 여기기도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생긴 "애사심" 덕분인지 내부적으로 일과 사람에게 치이는 일이 있었어도 그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게 만들다거나 일에 대한 동기를 잃어버리게 할 만큼의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러나 곧 후술 하게 될 사건을 겪게 되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일련의 신념 같은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시작점을 생각해 보자면 1년 전부터 급여가 1~2달씩 밀리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던 것 같다. 소규모 회사를 다니면서 급여가 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보다 실제로 체감한 것의 영향이 더 컸기에 그 에너지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처음 급여가 밀렸을 때는 사고 싶은 것이라던가 딱히 취미활동 같은 게 없었기에 1~2달 급여가 밀리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경제적으로 그렇게 타격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급여가 밀리기 전이나 후나 집과 회사만 오고 가고 주말에도 집에만 머무르며 잠시 카페에 가는 것 빼고는 어딜 놀러 나가는 성향은 아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면되니 20대 청춘의 절반을 보낸 이 회사를 꾸준히 다녀보고 싶다는 의지를 지키는 것이 가능했다.
23년 7월, 바로 저번 달이다. 급여가 밀리는 1년 동안 집과 회사만 오고 갔기에 이 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8월에는 경기도에 있다가 지방에 내려간 친구에게 연락해 서핑을 가기로 계획했고 갔다 와서도 여름을 조금 달리 보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만났던 사람들과 다시 만날 자리를 계획하고 취미 활동으로써 동호회 모임도 나가볼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7월 급여도 밀렸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자 계획했던 일들을 취소하고 나니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감당이 안되다 보니 회사에 출근해 있는 동안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아 급하게 이틀 연차를 쓰고 집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수면을 취하면서 이런 여유로움이라도 가져보며 마음을 다스려 보고자 했다.
사실 이틀 연차를 쓰기 전 회사 경영진 중 한 분에게 급여가 밀리는 것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한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민감한 이슈를 일개 직원 입장에서 쑤시는 것이기에 조심스러웠지만 그동안 회사 생활하면서 배운 교훈(업무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문제가 생기면 회사 동료에게 공유해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있었기에 호기롭게 제시했다.
정확한 대화 내용은 아니겠지만 아래는 대화 내용 중 일부이다.
경영진 : 급여가 밀리는 것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은데 혹시 개인적으로 힘든 것이나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 : 모두가 급여가 밀리는 상황일 텐데 제 힘든 심정을 말해봤자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회사 측에서 급여가 밀리는 것에 대한 차선책으로 직원의 심적인 부분을 해소해 줄 수 있을만한 요소들을 생각해 주시는 건 어떨지 싶습니다.
경영진 : 그동안 급여가 밀리는 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에만 집중에서 그 부분을 놓치고 있었네요. 혹시 생각하고 계신 방법이 있을까요?
나: 제가 생각하는 건 재택근무의 재도입입니다. 저희는 이미 재택근무를 시범적으로 도입했던 적이 있고 이때 직원분들의 굉장히 긍정적인 지지와 의견들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경영진: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회의를 해볼게요.
시간상으로는 2시간 정도의 대화를 했지만 핵심은 위의 내용이었다.
극단적으로 너도나도 힘든 상황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도 그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순전히 나 홀로 느끼는 힘든 상황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제하고 전사적 차원에서 직원의 분들의 피로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연차를 다녀왔다.
휴가를 다녀왔음에도 마음은 여전히 들쑥날쑥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고를 친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단순히 일개 직원이다 보니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사수분에게 먼저 공유하는 게 순서가 맞았을 텐데 이 순서를 건너뛰어 버린 것이다.
그동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사수분에게는 생각이 조금 정리되고 나서 이야기를 꺼내려했는데 경영진의 면담 요청이라는 이벤트가 먼저 일어나서 이야기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휴가 복귀 이후 사수분은 나를 따로 불러내어 면담을 진행했다. 다음은 사수분과의 대화 내용 중 일부이다.
사수 : 경영진과의 이야기는 잘 마쳤니?
나 : 경과나 결론은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사수 :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거야?
나: (경영진과의 대화 전달)
사수 : 재택근무를 하면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질 것 같아?
나 : 아무래도 골조는 바뀔 것 같습니다. "급여가 안 나오는 회사에 교통비 써가면 일하는 것"에서 "교통비 아껴가며 집에서 마음 편하게 일하는 것"으로요
사수 : 사실 이 상황에서 재택근무를 도입한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까. 반창고를 붙이기보다 의사한테 찾아가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받는 게 훨씬 득이 되니까
나 : 본질적인 문제 해결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에 저도 큰 이견은 없습니다. 그런데 의사한테 갈 돈도 없는데 반창고라도 붙여놔야 의사한테 찾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회사에 오래 다니다 보니 의견이나 생각은 가감 없이 솔직히 전달하는 편이 되었다. 이런 면에 대해서 사수분께서도 솔직히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시니 나 또한 이에 대해 고마운 일이 아닌가 싶다.
재택근무의 경우 회사 차원에서 정리하고 대비해야 할 요소가 많음을 알고 있어서 내가 의견을 제시한 일로부터 결론이 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정신적으로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으니 심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정도 기다리고 난 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사수분에게 물어봤지만 아직까지 결론이 나진 않았던 상황이었다.
사수분에게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물어본 날의 오후 2시쯤 결론이 나왔다. 결론은 내가 제시했던 재택근무의 형태보다 회사는 일주일 정도의 유급휴가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제시한 재택근무보다 회사에서 내어준 것이 많은 대담한 결정이라고 생각되었다.
회사에서 유급휴가를 준다는 것은 기본적인 연차 외의 추가 연차와 그 기간 동안 일을 하지 않음에도 급여를 산정해 주는 것을 의미하기에 직원의 입장을 헤아린 상태에서 제시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유급 휴가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틀 연차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되지 않은 마음이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에..
그런데 과거의 나를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떤 힘든 일이 있을 때 리부팅 기간을 가져왔던 것이 기억난다. 한 2~3일 정도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으면 그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다시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기기 시작함으로써 계속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코딩을 알게 되고 서울에 상경하고나서부터 하루에 아주 짧게 사소하게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그저 낭비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기 때문에 이 일주일자리 휴가를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계속 살아갈 힘을 길러내기 위해 읽지 못했던 책을 읽거나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에 가보는 등 알차게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