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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Sep 21. 2020

나답게 산다는 것

외향적인 사람을 위한 변명


말썽을 피진 않지만 그렇다고 모범적이지도 않은 아이,

선생님께 특별히 미움 받을 만한 짓을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칭찬 받을 만큼 돋보이는 면도 없는 아이.

한 마디로 반에서 있으나마나 한, 존재감 없는 아이.

난 딱 그런 아이였다.

당연히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유독 예뻐하는 남학생 K가 내 짝꿍이었다. 선생님은 손톱을 물어뜯는 K의 습관을 고쳐주려 무던히 애를 쓰셨는데, 어느 날 짝꿍이었던 나에게 중요한(?) 미션을 주셨다. 점심시간동안 K가 몇 번이나 손톱을 물어뜯는지 횟수를 세어보라는 미션이었다.

그게 뭐 그리 좋았던지 나는 점심시간 내내 K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며 횟수를 세었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생님께 달려가 횟수를 보고했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실 줄 알았던 선생님은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교실을 나가버리셨다. 들뜬 목소리의 나를 쳐다보던 선생님의 뜨악한 표정과 무안함에 얼굴이 빨개진 나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선생님이 K의 손톱 물어뜯는 횟수가 정말로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나에게 그 미션을 준 것도 그저 내가 K의 짝꿍이었기 때문이란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내가 겨우 그런 미션에 마음이 설레고 들뜰 만큼 칭찬과 인정에 목마른 아이였다는 걸 깨달은 것도 어른이 되고난 후였다.      




대학에 진학하여 운 좋게도 전공이 내 적성에 딱 맞음을 발견한 뒤부터 내 인생은 비로소 흑백영화에서 오색찬란 컬러가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교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크고 작은 성공을 경험하면서 삶이 즐거워졌다.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유대감을 경험하면서 에너지 텐션도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자존감도, 자아효능감도 높아졌고 그제야 비로소 나답게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렇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사람들과의 연결감에서 행복을 경험하며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그걸 몰랐기 때문에 늘 내 삶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재미도 의욕도 없었던 것이었다.     


내가 어릴 적 왜 그리 움츠러들어 있었는지, 왜 그리 학교가 재미없었는지 그렇게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난 학교에서 있으나마나 한 아이였기에 공부도 하기 싫었고 당연히 성적도 들쑥날쑥 했다. 사립 초등학교와 강남 8학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긴 했겠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난 존재감 없는 아이였으니 외향적인 나로서는 공부도, 학교생활도 재미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나답지 못한 삶이 나를 자꾸만 주눅들게 했고 효능감을 떨어뜨린 것이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반장이 되었거나 선생님께 공개적으로 크게 칭찬을 받는 경험을 했더라면 흑백영화 같았던 내 학창 시절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난 학교에서도 공부 잘 하고 싹싹한 모범생이나 말썽꾸러기보다는 오히려 존재감 없고 조용한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간다. 혹시 저 아이도 나처럼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기다리고 있는 외향적인 아이는 아닐까 궁금해진다. 타고난 성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성향을 드러낼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게 얼마나 그의 자존감을 낮추고 주눅들게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를 쳐다보던 선생님의 뜨악한 표정과 그 앞에서 무안함에 얼굴이 빨개진 초등학교 4학년, 주눅들은 어린 나를 보면 마음 한켠이 저릿해진다.

어른이 된 내가 다가가 괜찮다고, 잘했다고 안아주고 싶다.     




그러고 보면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인생에서 삶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는, 인정에 목말라 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란 걸 온전히 알게 된 지금은 더 이상 삶에 움츠러들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시행착오의 시간들을 겪어온 덕분에 오히려 조심하게 되었다.

나의 외향성이 내향적인 이들을 불편하게 하진 않을지 늘 조심스럽다. 나랑 좀 더 친하게 지내자고, 빨리 마음을 열라고 다그치게 될까봐 속도를 조절하려 애쓴다. ‘사회성’을 유독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 다른 이에 대한 호감이 부담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다짐한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연약함과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음까지도 인정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더 나이 들기 전에 마음의 쿠션을 깔아놓은 듯하여 새삼 든든해진다. 

결국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삶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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