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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Oct 03. 2020

마침표를 어디에 찍어야 할까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그 친구가 인물 사진에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찍히는 것에도, 다른 사람을 찍어주는 것에도 도통 흥미가 없었다. 내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겨우 포즈를 취해주었고,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한 자진해서 나를 찍어주는 경우도 없었다.

반면 나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인물 사진을 특히 좋아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에 담는 걸 좋아했고 함께 간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즐겨했으며 내가 찍히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처럼 정반대 유형의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니 사진을 찍고 찍히는 건 늘 순탄치 않은 과정이었다.

멋진 포토 스폿을 발견하여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친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충 포즈를 취하고는 셔터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바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나를 찍어줄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나도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면 그녀는 구도나 위치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대충(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다) 한 장 찍어주고는 끝이었다.




친구의 이런 성향을 알고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여행이 계속될수록 난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목을 걷다가 내 맘에 쏙 드는 포토 스폿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꼭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한껏 들뜬 나는 친구에게 여길 배경으로 나를 좀 찍어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는 여느 때처럼 대충 한 장 찍어주고는 무심히 카메라를 넘겼다.

그런데 다른 때와는 달리 난 그곳에서만큼은 제대로 된 사진을 갖고 싶었기에 친구에게 이런 이런 각도로 한번만 더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번에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처음과 별다를 바 없는 사진을 대충 찍어주고는 끝이었다.

평소였다면 나도 그냥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니면 괜한 오기가 발동했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결국 나는 내 맘에 드는 사진을 얻기 위해 친구와 그런 실랑이를 두 번쯤 더 해야 했다.

급기야 그는 나에게 자신은 인물 사진은 찍기 싫은데 왜 자꾸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냐며 화를 버럭 냈고,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말다툼을 벌였다.

여행 중에 처음으로 친구와 말다툼을 한 경험이었다.


사진에 대한 나의 반복되는 요구는 그의 무성의함과 짜증을, 그의 무성의함과 짜증은 나의 사진 욕심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네가 사진을 계속 무성의하게 찍고 귀찮아하기 때문에 자꾸만 사진을 다시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는 거라며 내 입장을 반복하여 주장했고, 반대로 친구는 자긴 사진에 관심도 없고 찍기도 싫은데 네가 자꾸 사진에 욕심을 내는 게 부담이 되고 짜증이 난다며 자신의 입장을 고집했던 것이다.     




이처럼 친구나 연인 사이에, 혹은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말다툼은 대부분 마침표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켜주는 관계를 지속시킬 때가 많다. 나의 행동과 상대방의 행동 중 어느 곳에 마침표를 찍느냐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다르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사진을 찍어주기 싫어하는 친구의 마음을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서 그냥 그 여행에서는 사진에 대한 욕심을 잠시 내려놓았더라면 그런 말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친구가 사진에 대한 나의 관심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서 비록 썩 내키지 않더라도 마음을 다해 찍어주었다면 역시나 그런 불편한 상황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그러지 못했고 각자의 관점에 따라 마침표를 찍는 바람에 마음의 불편함이 쌓여 결국은 부끄럽게도 낯선 여행지의 거리 한복판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우리는 바로 서로에게 사과를 했고 그 뒤로는 최대한 조심하면서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관계를 유지하긴 했으나, 그 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서히 연락이 뜸해져갔고 결국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원래부터 썩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그저 우연히 시간이 맞아 함께 여행을 가게 된 것이었기에 연락이 끊긴 게 꼭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한동안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더랬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토록 예민하게 굴었나 싶어 후회가 되지만, 여행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유치할 만큼 날이 서기 마련이니 그땐 내 입장에서만 마침표가 찍혀졌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여행에서의 친구 관계는 일상에서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고 조마조마하기에 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무던한 성격이라 해도 여행지라는 낯선 환경이 주는 긴장감과 지극히 단순한 일상 사이클이 더해져 나도 모르게 대화의 마침표 위치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대화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이 ‘마침표 원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에서도 행여 내가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함에 있어서 내 입장을 정당화시켜주는 위치에서 마침표를 찍지는 않았는지 늘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마침표 원리(Principle of Punctuation) :
입장을 달리하는 두 사람이 각자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관점에 따라 마침표를 찍게 되어 대화가 토막이 나게 되고 서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토막이 사용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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