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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Dec 15. 2020

마음의 면역력이 필요해

재난의 일상화에 대하여


결국 마지막 하나 남은 약속까지 취소했다.

이로써 12월 31일까지 모임이나 약속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직장도 아직까진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고 있지만, 짐작컨대 다음 주부터는 재택근무와 출근을 병행할 듯하다.

이번 주말쯤 더 늦기 전에 미용실에도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당분간은 그냥 참아야겠구나 싶었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일단은 최대한 미루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평소대로라면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연휴나 설 연휴에 떠날 항공권을 진작에 예매해놓고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한참 바빴을 테지만, 지금은 여행은커녕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인터넷을 봐도 죄다 확진자 관련 뉴스만 올라올 뿐, 즐거운 소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여행을 가지 못하는 세상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어디 여행뿐이겠는가. 식당도, 카페도, 미용실에 가는 것도 위험하고 학교도 문을 닫았으며 심지어 출근조차 위험한 세상이라니, 이쯤 되면 내가 지금 트루먼 쇼를 찍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무려 1년 가까이 이런 긴장감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순간순간 지금 이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작년 10월쯤이었다.

카메라 A/S를 받으러 갔다가 A/S 센터 직원이 수리한 카메라와 함께 센터 방문 선물이라며 KF94 마스크 2장을 주었다. 마스크도 사본 적이 없을뿐더러 KF94 마스크란 걸 생전 처음 본 나는 대체 KF94가 무슨 뜻이냐고, 이걸 왜 서비스로 주냐고 되물었더랬다. 내 질문에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자신도 의미는 잘 모르지만, 여튼 언젠가 혹시라도 필요하게 되면 쓰시라고 말했다. 엉겁결에 받긴 했으나 마스크를 쓸 일이 있겠나 싶어 서랍에 처박아 두었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그 마스크는 금스크가 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예지력을 지닌 선물이 아닐 수 없다.

1년 2개월 전만 해도 KF94라는 게 무슨 말인지조차 몰랐지만, 어느새 마스크 사재기가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주는 행위가 되었다니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까.      




이런 재난의 일상화 속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불쑥불쑥 찾아오는 '우울'일 것이다.

당장 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자영업 종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직장인이나 전업 맘, 아이들 모두 ‘우울’이라는 거대한 먹구름이 서서히 우리 일상을 잠식해오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다 보니 가끔은 좀 외롭고 가끔은 좀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 만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일상의 우울함을 이겨내기 위해 있는 힘껏 버티는 중이다.      


코로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면역력이 중요하듯이 이제는 마음의 면역력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이런 일상의 끝이 올지, 과연 마스크를 벗어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긴 할지, 언제쯤이면 항공권을 검색하며 여행 계획에 설렐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진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써야 할 일이다.   


재난의 일상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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