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선생이다
머리카락에 골고루 바른 염색약을 씻어내기 위해 스탭은 나를 샴푸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적당히 따뜻한 물에 머리를 헹구고 향 좋은 샴푸를 묻혀 조물조물 샴푸를 해주었다.
특별한 것 없는, 여느 때와 비슷한 샴푸 헹굼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머리에 감아놓은 수건을 푼 다음, 원장님이 마지막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다가오셨다. 그런데 원장님은 내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후두둑 털더니 옆에 서 있는 다른 스탭을 불렀다.
“가서 이 손님, 샴푸 다시 해드리세요. 여기 염색약이 아직 묻어 있잖아.”
내가 샴푸를 한 것도 아닌데, 내가 괜히 머쓱해져서는 벌떡 일어나 그 스탭을 따라나섰다. 근데 왜 원장님은 아까 샴푸를 한 그 스탭을 나무라지 않고 그냥 조용히 다른 스탭을 불러 샴푸를 다시 하라고 한 건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아까 샴푸를 받으면서도 특별히 소홀하다거나 대충 한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는데 어쩌다 샴푸가 제대로 안 되었는지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원장님이 지목한 그 스탭이 샴푸를 시작한 순간, 의문은 바로 풀렸다.
샴푸 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까와는 정말 격이 다른 샴푸였다. 아까 샴푸를 받으면서도 특별히 엉망이라거나 소홀하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이 스탭에게 다시 샴푸를 받아보니 아까의 그 샴푸는 성의도, 꼼꼼함도, 마음도 2% 부족한 샴푸였음을 알 수 있었다.
샴푸 하는 짧고 단순한 행위에서 이처럼 마음과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사실은 나 역시도 그동안 이 스탭을 보면서 참 꼼꼼하고 야무지다는 생각을 해왔기에 어쩌다 이 스탭이 휴무일인 날 방문하게 되면 내심 아쉽기도 했더랬다. 그런데 원장님이 그 많은 스탭 중에서 이 스탭을 콕 찍어서 샴푸를 다시 하라는 미션을 주셨다는 것도 조금 놀라웠다.
역시 사람들의 눈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지금까지 10년 넘게 이 미용실을 다니면서 스쳐 지나간 스탭들이 떠올랐다.
이 미용실은 연예인들이 많이 다니는 꽤 유명한 곳이다. 동네 미용실 규모는 아닌지라 스탭들도 많은 편이고 스탭에서 디자이너로 승진(?)한 케이스도 적지 않다. 실제로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이 미용실을 다니다 보니 현재 일하고 있는 헤어디자이너 중에는 꼬꼬마 스탭 시절부터 보아온 이들이 꽤 있어서 헤어디자이너로서의 프로페셔널한 아우라를 갖춰가는 그들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들은 스탭일 때부터 다른 스탭과는 뭔가 달랐다.
뭐가 다르다고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었지만, 이들이 내 머리를 만져주면 괜히 안심이 되었다. 어떤 스탭이 더 좋은지 원장님과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늘 그렇게 특별히 믿음이 가는 스탭은 어김없이 헤어디자이너로 승진하곤 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어떤 부분이 탁월해서 승진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손님인 나의 느낌과 평가하는 분들의 느낌이 다르지 않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샴푸 에피소드를 통해 그들의 승진 비결(?)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동네 미용실과는 달리 이곳에서 스탭으로 일하다가 헤어디자이너로 승진하면 바로 연예인 담당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니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기회일 것이다. 그러니 모르긴 해도 스탭들 간의 경쟁도 꽤나 치열할 듯하다. 그곳에서 일하는 수많은 스탭 중에 헤어디자이너로 승진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니 말이다.
물론 헤어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실력일 것이다. 이를 위해 다들 실력을 쌓고 트렌드를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 20대 초반부터 이곳에서 치열하게 노력할 테고.
냉정히 말했을 때 헤어디자이너가 되는 데 샴푸 실력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샴푸실은 손님과 스탭만 있는 공간이며 스탭이 샴푸를 하는 걸 지켜보는 디자이너는 없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그동안 눈여겨보았던, 결국 헤어디자이너가 되었던 몇몇 스탭들은 모두 샴푸나 드라이처럼 단순한 작업도 남달랐다. 그들은 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남들이 보지 않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가 신뢰를 만들고 그 신뢰가 쌓여 실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누군가는 샴푸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 시간을 아껴 하나라도 실력을 쌓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기회는 샴푸 하나에도 진심을 다하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을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두 번의 샴푸를 통해 나는 과연 드러나지 않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도 무의식중에 일단 티 나는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주어진 일의 경중을 함부로 단정 짓진 않았는지 반성했다.
고작 3분 간격으로 받은 두 번의 샴푸에서 느껴진 차이가 이토록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다니 역시 일상이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