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더구나 현실이라는 좁은 시공간을 벗어나 풍요로운 상상의 세계나, 환상, 마법의 세계로 가는 비밀의 열쇠는 무엇일까?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같은 판타지 이야기 속에는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열쇠가 있는 듯하다. 적어도 그런 세계에는 현실의 낡은 게시판에서 보는 정보와 지식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품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란 작품을 나는 영화로 먼저 만났다. 그래서인지 책을 대할 때, 어느 순간에는 영화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라, 나의 나니아의 세계에 덧칠을 하곤 했다. 때로는 책과는 다른 상상의 색채를 더해주는 글귀를 만나면 참 반가웠지만, 대체로 영화가 원작에 많이 충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전쟁에 파괴되는 폭격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 C.S. 루이스는 전쟁 기간 중 자신의 집으로 피난을 온 아이들을 통해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라는 모티브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첫 폭격 장면에서 대피소로 숨어들 때 에드먼드는 아버지 사진 때문에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다. 전쟁의 공포와 더불어 가족 간의 갈등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그 장면에서 난 예감할 수 있었다. ‘저 에드먼드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겠구나. 위기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에드먼드를 가족의 사랑으로 구해내는 이야기인가보다’라고. 처음에 그리 직감했던 스토리가 시간이 더해질수록 철학적이고, 심오하게 느껴지게 했던 것은 책에서 보여준 수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주는 의미 때문이었다.
전쟁 때문에, 친숙했던 마을이나, 포근하고 마냥 따뜻하기만 하던 엄마의 품을 떠나와 옛 것들이 가득한 낯선 늙은 교수의 집에 아이들이 맡겨졌다. 덩그러니 내 던져져 집안에만 갇힌 아이들. 가정부 매크리드 부인의 눈치를 보며 잦은 말다툼을 하는 아이들의 일상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옷장. 그것은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준 나니아로 통한 문이었다. 막내 루시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주는 이 집에도 어딘가에는 나니아와 같은 나라가 있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 나니아로 통하는 문을 가장 먼저 발견해냈을 것이다. 우리 역시도 일상에서 뭔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다보면 어느덧 그것에 대한 실마리를 자신의 손에 쥐게 되기도 하지 않던가!
이야기는 다시 그 옷장 속으로 들어가는 루시와 에드몬드 이야기로 간다. 에드몬드는 마녀가 터키식 젤리 사탕과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서 가족을 배신하는 배신자가 되고 만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보이지 않는 도덕, 신념 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보이는 물질에 의해서 어떤 일이 결정되기 십상인데, 하물며 어린 아이가 달콤한 마법의 사탕에 넘어가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드디어 아이들은 옷장 속 나니아의 얼음 세계에서 마녀의 마법에 맞서게 된다. 팀누스가 역모죄로 잡혀갔고, 말할 줄 아는 비버부부네 집에서 아슬란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다. 온 숲의 왕이며, 나니아의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분이라는 아슬란에 대해 책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아슬란이 오실 때 악이 바로 잡히리라.
그의 우렁찬 포효에 슬픔이 사라지고,
그가 이를 드러낼 대에 겨울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가 갈기를 흔들 때에 봄은 다시 찾아오리라.
이런 부분들을 보면 C. S. 루이스 작가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슬란의 존재가 그토록 영광스럽게 그려진 것은, 에이몬드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마녀에 의해 죽었다가 빛나는 황금 갈기와 세상을 지배할 만큼 포효하는 울음 소리를 내며 부활한다. 그것은 정말로 가슴 속에서 뭔가를 꿈틀꿈틀 치솟게 하는 부활의 몸짓이었다. 돌탁자 위에서 마녀와 같은 악의 힘에 죽음으로 맞서는 아슬란의 모습은 참으로 성스럽다.
그러나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아슬란은 그저 동물의 왕인 사자에 불과했다. 다른 많은 어른들의 가이드북이나 해설집과는 상관없이 마녀를 물리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사자일 뿐이었다. 마녀를 무너뜨리는 사자의 어마어마한 힘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는 것이 아이들의 세계가 아니던가! 죽은 아슬란의 사체에 엎드려 흘리는 루시와 수잔의 눈물은 구원으로 향하는 눈물이었다. 그가 어떤 존재를 암시하건 우리는 이 동화에서 아슬란이 살아난 것이 너무나 기뻤다. 우리 아이들은 무슨 이유에서건 주인공들이 울면 금방 슬픈 표정이 되고, 기뻐하면 환한 얼굴이 되곤 했다. 하지만 아슬란의 존재를 너무 크게 그리다보니 아이들의 비중이 좀 작아진 듯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나니아의 세계를 구하는 장대하고 스릴 넘쳐야 할 번뜩이는 이야기들은 이 책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 부분이 많이 실망스러웠다.
전쟁과 같은 부조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악을 무찔러 세상을 구원해냈다. 이처럼 고통스럽고 험한 순간이야말로 자신을 해방시켜줄 간절한 꿈과 희망을 더욱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는 자신의 자화상을 자주 대할 때, 외부의 강압적인 힘에 저항할 수 있는 아름다운 내면이 더욱 강해질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의 눈으로 보면 왕위 대관식 때, 인어들이 바다에 춤을 추며 불렀다는 그 노래 소리가 들릴 것이고, 어느덧 부드럽고 덥수룩한 황금빛 털과 바람결에 휘날리는 아슬란 사자의 갈기를 잡고 달리며, 세상과 맞서서 싸우는 자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일로 응어리진 가슴일 때, 이런 판타지 세계를 만나면 통쾌해진다.
아이들은 마녀가 죽는 순간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쉴 것이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며 책장을 덮을 것이다.
“난 마녀가 죽을 줄 알았다니깐.”
아이들만큼 나 역시도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을 돌로 만드는 수많은 마녀들이 반드시 응징을 당하리라고 믿고 싶다.
쉽게 절망하는 기다림이여!
죽음의 순간까지 기다림에 꺾이지 않고 늘 희망으로 나아가는 나의 영혼의 불꽃을 꺼뜨리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