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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람이 Jun 24. 2021

아이에게 들려줄 음성편지

 

 큰냠냠이 7살 때 일이었다.

유치원 여름방학 공문이 왔다. 방학하기 전에 유치원에서 부모와 떨어져 잠을 잔다고 했다.

낮에는 수영장에서 실컷 놀고, 저녁에는 유치원으로 돌아와 부모와 떨어져  잠을 잔다고 했다.  

준비물로 부모님들의 음성 편지를 녹음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내줄 것과, 이불과 홈매트, 여벌의 옷을 함께 보내 달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아이가 나하고 떨어져서 잘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떨어져서 잘 아이에게 뭐라고 음성편지를 써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일을 하면서도 계속 그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다가 이전에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썼던 글 두 편이 생각났다.  '나무처럼'은 내가 먼저 읽고,  '너희들도 별이 될 수 있단다'는 아빠의 음성으로 읽어 주면  큰냠냠이가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 오늘 큰냠냠이 유치원에 보낼 녹음테이프 만들어야 해요. 내일까지니까 오늘 꼭 해야 하는데요. 제가 미리 얘기했죠? 아빠 뭐라고 녹음할 건지 생각했어요?"


 "아니, 깜박 잊었네. 어쩌지? "


 "그럴 줄 알았어요. 예전에 제가 썼던 글 두 편 녹음할까요? 한 편은 내 목소리로, 한 편은 아빠 목소리로 해주게요. 오늘은 일찍 좀 들어오실 거죠? "


 그리 다짐을 받은 후, 약속을 잘 지키는 남편을 믿고 기다렸다. 아이들을 씻겨서 재우고, 이것저것  캠프에 필요한 짐도 다 챙겨 넣었다. 이제 녹음테이프만 넣으면 피곤한 하루가 마감되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녹음을 마쳤다. 그런데, 남편은 그날따라 회식자리를 거절하지 못해서 12시를 넘겨서 집에 들어왔다.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집에 돌아온 남편은 거나하게 취해서 혀가 꼬였다. 해롱해롱 웃으면서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늦었지만 녹음은 할 수 있다며 써 놓았던 글을 어서 보여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금방 끝낼 듯이 옷도 벗지 않고 덜렁 앉았지만,  막상 연습 삼아 해보니 혀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를 향해 어깨들 쓱 들어 올리며, 어떡하지? 하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얼른 부엌에서  얼음물을 들이켜고,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머리를 몇 번이고 흔들고 화장실에서 돌아와 녹음기 앞에 다시 앉았다. 찬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려고 그랬는지 팬티만 입고 나타났다.

 시간이 흘러 제법 밤이 이슥해졌다. 남편이 빈손으로 오기 미안해서 사온 팥빙수가 많이 녹아있었다. 난 남편이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팥빙수부터 먹자고 했다.

 그리고는 카세트테이프의  버튼을 찰깍!  눌렀다. 먼저 내가 녹음해 놓은 것부터 들어보고 다음으로 아빠 음성을 녹음하자고 했다.


 오늘은 엄마하고 아빠가 나무 얘기하고 별 얘기를 해줄게. 친구들하고 다 같이 들어보렴.   


나무처럼


엉금엉금.....바스락바스락...

으악! 악어떼! 하는, 정글숲같은 곳엔

나무가 아주 많단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칭찬을 듣는 나무들

세상을 위해 하는 일이 너무나 많은 나무들


책상이나 가구나 집을 지을 때는

뚝딱뚝딱, 나무는 꼭 필요하지


 종이나, 재미난 동화책도

쓱싹쓱싹, 나무로 만들고


사과, 포도, 복숭아 같은 과일들도

새콤달콤, 나무에서 열린단다


알록달록 예쁜 꽃들도

도담도담, 나무에서 피고


나무는 햇볕을 가려서

삐적삐적, 흐르는 땀을 식혀주고


우리가 숨 쉬는 공기도

뿜바뿜바, 나무가 뿜어내고


후두둑 후두둑 억수 같은 비가 와도

울끈불끈, 땅을 꼭 끌어안고 있는 나무 덕분에

산이 무너지지 않는단다


끈적끈적한 나무액으론

자동차 타이어, 지우개, 신발도 만든단다.


너희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카카오나무에서

달콤한 사탕은 사탕수수 나무에서 얻는데  


나무는 참~ 소중한 것이지?

너희도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나무처럼...  


다음엔 아빠 차례다. 술 먹고 긴장을 했는지 계속 뺨을 비벼댔다.  몇 번을 혀 운동을 하며 눈을 부릅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녹음을 하다가 연거푸 발음이 꼬이니 갑자기,


 "야! 뽀뽀 한 번 하자. 그러면 긴장이 풀려서 잘할 것 같다. "  우스갯소리로 순간을 모면하려고 했다.


 "핑계 대지 말고. 빨리 해요. 괜히 미안하니까..." 늦게 술 먹고 온 것도 미안한데, 자꾸 실수하는 바람에 아내가 잠을 못 자고 눈을 비비며 버티게 하는 것이 미안했나 보다. 그러더니 덜컥,


"그러면 라면을 끓여 주라. 먹고 나면 든든해서 잘할 것 같다"라고 했다.


"라면은 좀 그렇고 팥빙수 더 먹으면서 해요. 팥빙수 남았잖아요.."

그렇게 팥빙수를 싹싹 다 긁어먹고 나서야, 그럭저럭 녹음이 시작됐다. (아빠 목소리로)  


너희들도 별이 될 수 있단다


밤하늘을 본 적 있니?


모두가 저마다 이름이 있단다.


오래전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주었지   


너희들도 별에게 이름을 붙여줘 봐


개똥이,뚱땡이,밥땡이,놀땡이,별땡이별..


별들은 저마다 사연이  많단다   


아들 에로스를 끈으로 묶어 물속으로 뛰어든 아프로디테의 이야기는

물고기자리별   

남매를 구한 황금 양은 양자리 별  

쌍둥이의 사랑 얘기 쌍둥이자리별

   

너희들도 저 하늘에 별이 될 수 있단다

   

그 별은 네가 어떤 일을 는지 내려다보겠지


 네가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별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게 자꾸나.  

(그리고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야! 사랑해!


엄마하고 떨어져 자는 것을 내도록 걱정하는 딸에게 좋은 음성 편지가 되길 바랬다.

창밖에는 부슬부슬 비들이 '이 집에는 뭔 일로 늦게까지 불이 켜졌나' 들여다봤다.

술 깰라고 팬티바람으로 팥빙수를 먹는 아빠 모습이 이상타 싶다가, 나름대로 감정을 넣어 딸에게 들려줄 글을 열심히 읽고 또 읽는 아빠에게 시원한 빗소리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나는 짐들을 유치원에 가져다 놓으면서 선생님에게 음성 테이프를 건넸다. 캄캄한 것을 좀 무서워한다는 말을 전하며, 티셔츠 하나를 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 이 티셔츠 제 옷인데요. 아이 잘 때 잠옷으로 좀 입혀 주시겠어요?"


선생님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전해주겠다고 했다. 그 티셔츠는 우리 아이하고 비슷하게 생긴 그림이 그려져,  딸이 좋아하는 티셔츠였다.


그다음 날, 아이의 이불 짐 등을 가지러  유치원으로 향했다. 유치원에 들어서자마자 큰냠냠이가 와락 품으로 뛰어들었다.


"엄마! 어젯밤에 자면서 나 쬐끔 울었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

가슴에 울컥 올라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독립적인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곧추 세웠다.


"그래도 어젯밤에 재밌는 일도 많았잖아. 뭐가 제일 재미있었을까?" 감정을 추스르고 아이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엄마! 어제 우리 촛불놀이했어요. 컵에다 초를 넣어서 들고, 선생님이 좋은 얘기 하셨어요"

 "그랬구나. 무슨 얘기를 했을까. 선생님이?"

 "선생님이 나쁜 마음들은 촛불에다 다 태워버리고, 좋은 마음들은 큰 숟가락으로 많이 퍼서 마음속에다 담으라고 했어요"

 와아~ 그렇게 좋은 얘기를 하신 유치원 선생님도 대단하고, 그 말을 새겨듣고 엄마한테 전해주는 딸도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아이는 사람들이 심은 씨를 마음속에 곱게  키우고 있었다.

"엄마도 네 마음에다 퍼 담고 싶은 것이 많은데..."

"뭔데요 엄마!"

"어제 엄마가 테이프에서 들려주었던 것처럼 말이야. 네가 나무처럼, 별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소중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꼭 퍼 담아주고 싶구나"

"아! 그 음성편지! 저도 들었어요. 나무처럼, 별처럼 그렇게 말이죠?"

"그래 그래"

"마음에 퍼 담을 게 참 많아요. 엄마!"

"하하하 그렇지 좀?" 서로 웃다가, 엄마 셔츠를 계속 입고 있는 큰냠냠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를 따라오는 그림자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우리 뒤를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잠이 덜 깨었다는 듯, 소파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었다. 나는 햇살 같은 눈길로 아이를 내내 바라보았다.




 그때 입혔던 추억의 티셔츠랑, 버리지 못해서 쌓아 두기만 했던 오래된 옷들을 정리했다. 남편은 옷장 옆에 새 박스를 놓아두었다. '신박한 정리'를 보더라도 물건을 비우는 것부터 해야 신박한 정리가 된다면서, 오래된 옷에 집착하지 말버렸으면 좋겠다는 얘기는 예전부터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케케 먹은, (남편의 말에 의하면 몇 번 더 얘기하면 100번을 채울지도 모르는) 이런저런 추억 얘기들을 며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우겼다.


"당신이 매달 후원하는 것처럼, 옷도 기부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잖아"그러면서 옷 버리는 상자를 놓아 두었다.

 한 상자 채우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남편은 옷수거함에 버리고 왔다. 내가 망설이다 다시 주워 담을까봐 버릴 때는 과감하게 버렸다.

 나는 비움을 떠올렸다. 그냥 버려서 얻는 경지가 아니라, 제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눔으로써 비움에 드는 '장자의 비움'을 떠올렸다. 워낙 추억의 물건들을 쌓아 두는 타입이라 장자의 비움을 떠올리니 그것이 순리인것 같고 자연스러운 듯 싶었다. 젊을 때는 자연스럽다는 것마저도 인위적인 자연스러움이었는데, 그때는 자연스러움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욕망이 가득했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자연스럽다는 것이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제, 비우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어 간다. 물건에 어린 추억들은 마음에 담아 두고 '나누는 비움'을 생활 속에 실천하고 살아야겠다.




사진 : 자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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