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들을 헤아리는 깊은 대화를 즐기며 여행 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팀 리포터 작성, 동아리 회지 편집 일, 토론 일지 작성도 순식간에 다 해놓고서 며칠 씩 바람같이 잠행을 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비칠 때가 있었다. 사실 나는 그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며칠 동안 밤샘을 하거나, 많은 일을 혼자 감당을 하다 못해 도망가기 일쑤였다. 3일 연속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혼자서 과한 책임을 다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일을 끝내면 몸살을 하느라고 앓아누워서 또 그들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였다.
그렇지만 사라졌다 나타나면,
“그동안 왜 안보였어?”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이렇게 묻기 일쑤였고 그럼 난,
“쉼표로 잠수하는 타입이에요. 며칠씩 혼자 잠수를 타야 다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ㅋㅋㅋ”하며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며 나의 사라짐을 미화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좀 심하게 ‘몰빵 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인지 물어볼 사이도 없이, 종종걸음을 치며 쫓겨다니는 듯 후다닥 거리는 나를 자주 목격했다. 무엇 때문인지 여학생 휴게실에서 조용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도, 조용히 사라질 때도 있었다. 걸을 때도 무슨 생각에 잠겨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말을 건네야만 인사를 알아차리는 실수를 반복하곤 했다. 그렇게 심하게 일에 몰입하는 타입이라 무슨 일인가를 끝내고 나면 어디론가 떠나야만 그 일에서 해방되는 어리석은 일면이 있었다. 사실 난 멀티가 안되고 한 가지 일에 꽂히는 타입이라
여행이 주는 해방감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 지리산 해돋이를 보기 위한 산행의 글이 떠오른다.
턱턱 죄어 오는 숨을 고를 때마다, 드러내 놓은 살갗이 바람에 에이어 움츠러들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이곳은 네가 그토록 열망했던 지리산 해돋이 가는 길이다'를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오르는 산행은 온몸을 긴장시켰고,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사람이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여실히 느끼게 했다. 그렇게 점차 어둠에 적응을 해가자, 어둠이 모두 똑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캄캄한 것 안에 있는 음영의 차이가 몸으로 느껴졌다.
지리산 고사목 1
거의 천왕봉에 다 왔다고 하던 장터목에서 돌 비탈을 올라 제석봉 일대의 고사목 지대를 만났다.
그곳 고사목의 풍경은 나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다.
눈을 뗄 수가 없어, 덩그러니 산행을 잊은 채 그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옛날에는 울창한 자태를 자랑하던 전나무, 구상나무 등이 숲을 이뤘다는데, 사람들이 불을 질러 그토록 황폐해졌다고 했다. 고사목들은 골짜기를 휘도는 바람을 맨몸으로 부대끼고 있었다. 생가지 찢어내는 아픔, 옹골찬 마디마디를 끊어내는 고통을 견디며 안을 제대로 비운 고사목은 죽어서 천년을 넘게 산다고 했다. 흰 눈이 소롯이 얹어져 그리움을 머금은 고사목들은 굳은 침묵으로 모진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바람을 가를 듯이 뾰족한 가지 끝마다에 앙상한 불멸의 혼을 걸어 놓고, 죽어서도 죽지 않는 영혼으로, 살아서도 살아 있지 않는 몸으로 서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니,
“말로 행동하지 말고, 행동으로 말하라”라고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 같았다. 그 고사목의 경지는 나의 새내기 대학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었다. 일단 행동이 무르익을 때까지, 엄살을 부리며 말을 앞세우는 것을 남발하지 않았다.
고사목을 바라보고 있던 내가 그토록 부끄럽게 여겨졌던 것은 내 감정에 충실한답시고 주변을 고려하지 않고, 내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 때문이었다. 저렇게 자기를 비워내는 고사목의 경지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힘들어지면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늘어놓지 않고 그저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어떤 땅과 자연에 적응한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와 이벤트 속에서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설렘을 건네주었다. 지금의 나와는 다른다는 것에서 오는 일렁임이
나의 삶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 고사목 2
여행은 또한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생명들도 만나게 했다. 그 생명이 마음에 들어와 작은 불꽃이었다가 언젠가는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기도 했다. 신기한 생명력을 만나고, 아름다운 초록세상에 감탄하고, 맛보지 못했던 음식을 경험하고, 다 알 수 없는 다양한 삶을 체험하게 될 때 나는 새롭게 알록달록해진 자신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한 걸음씩 새로운 것에 다가가는 다양한 발견의 과정이기도 했다.
자연과의 공감을 통해 현실에서 상처 받은 마음이 누그러지고,
흥겹고 저절로 신이 나는 흥분 속에서 일상의 탈출과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여행을 하다가 많은 문제에 부딪히면서 생각의 순발력도 키웠다.
힘든 과정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자신의 생각이 넓혀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살아가면서 한계를 느껴왔던 문제들에 대한 해결과 실천방향들을 긍정적 에너지로 해결해 나갈 힘을 얻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두 냠냠이를 키우면서 난 일상에 갇히게 되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키워서 냠냠이들은 쑥쑥 커가고 있었는데,
나는 계속 밥맛이 없고, 속에서 어떤 뭉치가 치밀어 오를 듯 갑갑하고 머리가 아파서 두통약을 자주 먹을 때였다. 친정엄마가 전화가 왔다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자주 아파~ 내가 몸이 안 편하니까 냠냠이들 음식 해주는 것도 시원치 않고..”
“엄마가 올라갈 일이 생겼는디 잘됐네 마. 아이들은 내가 볼 테니까 병원을 좀 다녀오면 되겠네”
그렇게 친정엄마의 설득으로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한약방을 갔다. 한참을 진맥을 짚어보시고, 여러 증상을 듣고 나시더니 한의사는 단칼에,
“화병이네요”라고 했다. 거참 황당한 변명이다 싶었다. 무슨 ‘화병’하는 눈길로 친정엄마를 바라봤더니 엄마는 냅다,
“원래 어딜 방랑벽 있는 아처럼 잘 쏘다니던 아인데, 애기들 키우느라고 집에만 박혀있으니까 화병이 났는가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엄마 고집 때문에 한약을 지어와 어쩔 수 없이 먹었다. 그렇지만 한약을 먹을 때마다 엄마의 진단이 한의사보다 더 명 진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냠냠이들 데리고라도 어디든 떠나야 해. 그래야 내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눈뜨면 해야 할 스케줄 목록들이 나를 기다렸다.
남편은 다 넘어가고 있는 사업에 정신없이 쫓아다녔고, 빚만 쌓여가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 먹이는 일, 씻기는 일, 집안일들, 그리고 책냠냠이들 수업 준비 등 너무나 많은 일의 목록들이 빳빳하게 줄이 그어지거나, ok 빨간 마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만 벌리면 할 일들을 만드는 냠냠이들의 일상은 어느 때는 소코뚜레를 한 소처럼 내 고삐를 죄었다. 혹여 냠냠이들이 아프거나, 외출할 일이 생기면 앞뒤 없이 뛰는 큰냠냠이를 쫓아다니느라, 하네스를 한 개같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달음박질을 해야 했다. 그렇게 반복되는일상에 나는지쳐갔다. 결혼 전의 나처럼 잠행을 하지 못하니 쌓여서 화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던 것이었다. 너무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타협하기로 했다. 냠냠이들과 가능한 여행을 다녀보기로 했다. 진짜 화병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서 예전에 내가 홀연히 일상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멀리 떠날 수 없으니 가까운 곳이라도 떠나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냠냠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간식과 물병과 기타 용품들로 한 가방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게다가 잘 때마다 찾는 ‘하하’라는 쿠션 인형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자 둘째가 심통을 부렸다.
“엄마! 나는 하하 있어야 잠이 와요~”사정하듯 간절한 눈빛을 발사하는 바람에,
힘들게 공갈젖꼭지를 끊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하하’를 챙겨야 외박을 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하루 정도의 체험에 그쳤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홀가분한 여행이 될 수 없었다. 일단 어디를 가든 사람이 많은 곳에 있을 때의 우리 냠냠이들의 호기심을 집중시킬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구질구질하게 가지고 다녀야 할 아이들 용품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아이들 놀이공간이 있으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을 때를 대비해 장난감이라도 가져가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 나를 보고 친정엄마는,
“아이고 별시러봐라~ 그냥 좀 조용해라 하면 되재. 그런 걸 아이들 비위를 다 맞추고..별시럽다 마” 하시며 핀잔을 주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맘충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의 시선을 싫어했고, 그리고 우리 냠냠이들을 야단치는 어른들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큰냠냠이 뒤를 따라 다니다, 둘째를 놓치는 일도 생겼다. 한 명이 다쳐서 병원을 다니는 일도 생겼다. 그래서, 둘 데리고 여행 가는 일에는 가능하면 남편과 동행을 했다. 그렇게 체험을 다니고 여행을 해보니, 냠냠이들도 나름대로 여행을 다니는 데 익숙해져 갔다.
나 또한 점차 나의 체질을 바꿔가면서 성숙해져 가고 있었다.
냠냠이들 덕분에 내가 사람이 되어가는 듯했다.
물이 스스로 움직여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듯이, 나는 냠냠이들의 물이 되어 주기로 했다.
바다를 채우고,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내릴 날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얼음이나 수증기가 되지만 결국 물은 물이다.
비록 살아가는 내내 달라지는 외형만큼 변하는 것도 있겠지만, 냠냠이들의 목마름을 채우고, 자양분이 되는 물이 되고 싶다. 변함없이 올곧게 ‘물은 물이다’를 말 할 수 있는 물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