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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람이 Nov 18. 2020

조개껍데기가 들려주는 시

내 등은 아직도 파도치는 물살을 닮았습니다.

딱딱한 등에 서린 그리움이 파도 소리를 냅니다

탱탱했던 몸은 갈리고 파헤쳐져 껍질만 남았습니다.

검푸른 응어리마저 다 비운 텅 빈 가슴,

그러나 그리움은 비워지지 않았습니다.


pixabay

 펼쳐진 해변가 모래 위에 큰 꼬막 조개껍데기가 오롯이 놓여 있었다.

하늘을 향하여 절규하는 듯 입을 벌리고서 물결에 많이 씻겨 표면이 하얗게 깎이어 있었다.

그 꼬막 껍데기를 만난 곳은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할머니가 사셨던 곳은 고흥군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에 속하는 나로도라는 섬이었다.

창호지 문을 열면 대청마루의 나무 결이 햇살에 반들거렸고,

마당을 가로지르면 정겨운 돌담이 보였다.

그 돌담은 내 키보다 낮았다. 할머니가 전을 부치거나 수제비를 만들어,

이웃 아줌마에게 돌담 위로  손쉽게 접시를 건넬 만큼 낮은 키였다.


 돌담 위에 올라앉으면 바다가 보였다.

고래 등처럼 넘실대는 바다, 폭풍이라도 몰아치면,

'누구를 잡아먹으려고 저리 요동을 칠꼬' 그리 할머니가 혀를 차던 바다가 보였다. 할머니는 바다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내다보시곤 했다. 하기사 그 바다는 많은 생명을 앗아간 바다였다. 그 섬에 사는 장정들은 거의 뱃일을 했으니까.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 오는 생업이란, 그야말로 날마다 파도를 타며 온갖 종류의 멀미와 구토를 다 겪어내는 일이었을 게다. 비린내가 살내음이 되는 일. 구토를 느끼지 않을 때쯤이면, 육지의 평평하고 딱딱한 방에서도 배에서 자는듯한 착각이 들어 잠을 설치기가 일쑤인 뱃사람.

 그런 이웃 친척 중 누군가가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할머니는,

'저것이 또 삼켰다' 그리 한숨을 섞은 말을 뱉었다.


 사촌 언니는 할머니의 첫 손녀였다. 전쟁통에 아주버니가 돌아가시고 형님이 시집을 가셔서, 자식이 없었던 할머니네는 아주버니의 자식들을 키우셨다. 그 큰아들이 일찍 결혼해서 육지로 분가하면서 손녀딸을 맡기고 갔다. 혼자가 되신 할머니에게 자식 대신으로 키우시라고 딸을 두고 섬을 떠나셨던 것 같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언니는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며 할머니와 살았다. 그래서 외롭게 자랐다. 뻘로,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다니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야 했던 언니는, 동네에 가족처럼 지내는 오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손잡고 소꿉장난을 하던 그 오빠를 많이 의지하는 듯했다. 그 오빠는 언니의 일기장이었다. 내가 언니에 대해 틀리게 말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 오빠는 빙그레 웃으며 언니의 속마음을 얘기해주곤 했다. 언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정말로 신기했다.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다 알고 있다니...


 방학이 되어서 그 섬에 놀러 가면 우리는 들로, 산으로, 바닷가로 놀러 다녔다.

오빠가 나무하러 가는 길도 따라가고, 등대로 낚시하러 가는 길도 따라갔다. 등대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술래놀이도 했다. 낚시하는 오빠 옆에서  사촌언니는 '등대지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언니하고 오빠가 가르쳐준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이라는 동요에 우리는 화음을 넣어서 신나게 불렀다.  오빠는 손재주가 좋아서 솔방울로 온갖 것을 만들었다. 눈사람도 만들고, 허수아비도 만들고, 집도 만들고, 온갖 인형을 만들어 주었다. 나뭇잎 줄기를 따서 피리도 불어 주었다. 소리가 너무 신기해서 나는 걸핏하면 나뭇잎 피리를 불어 달라고 졸랐다. 오빠는 나를 무동을 태우고 산을 잘도 내려갔다. 우리는 이름 모를 무덤가에서 귀신놀이도 하고, 무당 놀이도 했다. 오빠는 무당 흉내도 참 잘 냈다.


 그동안에 할머니는 굴을 따러 가거나, 뻘에 조개를 하러 가곤 했다. 어느 날은 뻘밭에서 꼬막을 해오기도 했다. 한쪽 무릎을 길쭉한 널판지에 올려놓고, 다른 한쪽 다리는 노가 되어 뻘밭을 헤치면서 꼬막을 주우러 다녔다. 몸을 어찌나 수그려야 하는지, 다녀오시면 허리가 많이 아프시다고 했다. 바짓가랑이가 온통 젖어서 살갗에 붙으면,  땀으로 범벅이 된 몸에 찬바람이 휘감기어 추운기가 온몸에 든다고 했다. 그래서 몸이랑 손이 잘 튼다고 했다. 정말로 할머니 손등은 트고 갈라져 피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사촌언니는 영양크림을 손에 발라주며 '바람이 정말 싫다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어느 해 겨울, 방학 때가 되어 또 할머니 댁에 놀러 갔다.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엄마와 함께 인사하러 갔었다. 처음에는 내가 뱃멀미를 해서 냄새가 나서 언니가 나를 멀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흘러갈수록 뭔가 달라진 사촌언니를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성숙해졌고 말 수도 많이 없었다. 말 걸기도 어려울 만큼 우울한 얼굴일 때가 많았다. 쭈볏쭈볏 말을 걸면 대답을 건성으로 받곤 했다.


 그런데 사촌 언니는 걸핏하면 어린 나를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 내 외투 단추를 잠가 주고 모자를 씌어 주면서,

 "할머니한테 야단맞을지 모르니, 니가 바닷가에 가자고 졸랐다고 해야한다" 그리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는 바닷가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 언니! 왜 자꾸 여기 와?"

 "......"

 "얘기 좀 해 봐"

 "그때, 나뭇잎 피리 불어주던 오빠야 생각나나?"

 "응"

 "그 오빠가 바다로 갔데이..."

 "일하러?"

 "아니! 영원히 바다로 갔데이.."

 "인제 안돌아 와?"

 "그래. 영원히..."

 그리 말하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우는 언니를 보니 나도 슬펐다. 언니와 오빠가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언니는 나를 꼭 껴안고 울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 어깨에는 눈물이 얼룩져서, 차가운 기운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슬픔에 감염이 되어서 언니를 따라 훌쩍거리고 나면, 시린 겨울바람은 도톰한 볼때기에 따끔하게 스며들었다.


 해변가 꼬막 껍데기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몹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고향 바다 내음과 노래를 간직하고 있었을 그 꼬막은, 어찌 홀로 남겨졌는지 뭔가를 절규하는 몸짓으로 있었다.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 눈물을 흘리던 그 언니처럼....


 밥 먹을 때가 되어서 언니를 찾으러 바닷가에 가면, 언니는 내가 옆에 왔는지도 모르고 바다를 향하여 중얼중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저 조개껍데기가 들려주는 시와 같은 고백을 했을 것이다.

 

pixabay


겹겹이 굳어가는 기다림으로 하루하루가 쌓여 가고 있습니다.

휙, 무슨 소리가 들려오면

그대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습니다.

그대의 하얀 거품에 나뒹굴 때의 어둠은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그대의 부드러운 물결에 휩싸일 때의 해는 뜨겁지 아니하였습니다.

아! 기다림은 너무나 큰 상처입니다.

저는 그대의 침묵이 되어도 좋습니다.

기다리며 홀로 선 이 시간, 그대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습니다.

그대에게 가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더 부서져야 합니까?

그대여!

내게로 돌아와 주오!

수 만 번 무너졌던 그리움만큼 하얗게 파도쳐,

젖은 몸부림 그대로 내게 돌아와 주오.

이제 그만,

파도 소리를 머금은 이 그리움은 넉넉한 그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조개껍데기가 쏟아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가슴에서 울컥 설움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다.


언젠가 친정엄마가 그 사촌언니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화를 받는 동안, 해변가 모래 위에 오롯이 놓여 있던 하얀 꼬막 껍데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겨울 바닷가에 쓸쓸하게 던져진 꼬막 껍데기들.

많은 사람들의 아픈 사랑 이야기가 모래 같은 반짝임으로,

해변가 파도에 부서지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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