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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Aug 16. 2024

책으로 허기를 채우며

눈에 총기를 다시 불어넣기

도서관을 드나들며 굶주렸던 사람처럼 책을 읽어댔다. 일단 한국문학 쪽으로 가서 좋아하거나 궁금했던 작가의 소설 골라내고는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는다. 읽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세계관에 도착해서 다 읽고 나면 크게 숨을 내쉬며 여행을 끝낸 기분을 느끼며 ‘하, 가성비 좋은 여행이었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또는 작가의 스토리텔링 능력을 질투하며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는다. 그리고 집에 가서 읽을 소설을 두어 권 더 고르고, 사회과학 코너로 가서 책 제목을 찬찬히 본다.


사회과학 책을 고를 때는 묘한 설렘이 있다. 어떤 책이 나한테 새로운 관점을 열어줄 수 있을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서 책을 꺼내본다. 목차를 슥 보고 내가 궁금해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 같으면 소설책 위로 안착한다. 두세 권 정도를 고른 후 책을 한 아름 안고는 대출 기계에 올려놓고 뿌듯한 마음으로 나온다.


사회과학 책의 주제는 그때그때 관심 있는 키워드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지금도 그렇게 느끼지만) 생각할 땐,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충동인류의 미래'라는 카피에 끌려 <근시사회>를 골랐다. 어쩌다 모두가 장기적인 득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이익만 좇게 됐는지와 그게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망쳐갔는지를 설명한 책이었는데, ‘도대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망가졌는가'라는 뭉뚱그려진 절망만 하다가 ‘어쩌다'를 알게 되니 오랜만에 뇌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일어난 퇴사라는 비극이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대한 사회 구조와 흐름의 영향이 컸음을 이해하게 됐고, 개인을 향하던 화도 사그라들었다.


역시 사회과학은 재밌다… 입맛을 다시며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이어서 읽었다. ‘대단히 혁신적인 기술 개발이나 경제나 고용 성장이 더 이상 일어나지도, 기대할 수도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적인 생활 양식을 제안하는 책<성장 이후의 삶>도 흥미로웠다. ‘무분별한 소비를 참자'의 금욕적 방식이 아니라 소모임이나 수공예 같은 다른 쾌락이 필요하다는 ‘대안적 쾌락주의'를 권유한다.


그런데 이거, 내가 지금 하는 거 아닌가? 본격적인 소모임 활동은 딱히 하고 있진 않지만, 요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며 글을 쓰며 대안적 쾌락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오호라, 나 잘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얻으며 책장을 덮었다.


최근엔 영국에서 일어난 가짜뉴스로 인한 폭력 시위가 충격적이었던 터라, 도대체 왜 가짜 뉴스에 사람들이 넘어가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한 책 <포스트트루스>를 읽었고, 이런 내용이 인상 깊었다. 옛날엔 마을을 이루며 사람끼리 실제로 부딪히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다 보니 개인의 강하거나 과격한 생각이 다듬어졌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은 각자의 방에서 집단적 독백을 한다. 내 알고리즘에 뜨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하고만 교류하며 더 생각이 고착화되고 과격해진다는 것이다.


주제는 다르지만 다양한 책에서 말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은 비슷하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바로 공동체다. 사람들과 직접 만나야 유대감의 즐거움을 느껴 무분별한 소비를 안 할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고 때로는 논쟁도 하며 서로의 합의점을 찾고 정보의 합리성을 판단하는 사고력도 기를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이어진 생각은, ‘유료 네트워킹 서비스들이 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였는데, 아니라고 혼자 결론 내렸다. 넷플연가, 트레바리 등의 서비스는 대체로 쉽게 결제할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 아니다. 그 말은 즉슨 이 금액을 쓸 수 있는 사람들만 온다는 것.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그 정도의 경제적 여건이 되는 사람들로 걸러지고,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기에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들은 매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많이 모객해야 하는데, 그러면 한 주제에 대해서 돌아가면서 짧게 짧게 자기 생각을 말하기 바쁘고, 핑퐁의 대화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도 ‘공동체'라고 보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다. 아무튼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일하면서는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어려웠다. 뉴스만 얼핏 보고 화내고 욕하는 게 최대의 관심 표현이었고, 그 화의 원인도 대책도 알 수 없었다. 퇴사 후에 시간도 많아졌겠다, 그동안 몰랐던 사회의 이모저모를 탐독하며 생각에 잠기곤 한다. 학자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지만.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사회에 휩쓸려 살기 싫다. 적어도 어떤 문제가 있는지,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지 알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는 행위 자체로도 내게 어떤… 주체적인 힘이 생기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에게 요즘 책을 읽으면서 이 사회가 왜 이렇게 됐는지를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더니, 선배는 “그렇구나. 근데 이제 앞으로 나아갔으면 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라 끄덕이고 넘어갔는데, 이렇게 대답할 걸 그랬다.


“난 이걸 알아야 나아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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