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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Jul 29. 2024

쇼펜하우어 씨, 저희 통하는 게 있군요

퇴사자를 위한 쇼펜하우어 철학

본능적으로 회사에서 쌓인 독을 빼내고 싶었고, 아름답고 멋진 것만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퇴사한 날로부터 2주 동안 전시를 보러 다녔다. 원래대로라면 전시를 1시간 정도 휙 둘러보고 왔다면, 이제 시간도 많겠다 2시간 넘게 천천히 관람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열심히 들으면서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경청하는 게 좋았고, 보는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보면서 작품을 다양하게 감상하는 게 좋았다. 감상하느라 바빠서 현실 세계 이야기가 오가는 카톡 알림과 SNS로부터 멀어진 채, 작가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과감한 작업 방식에 혼자 “허!”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오롯이 그 시간에 집중했다.


그렇게 집중하는 시간 동안엔, 주파수를 잘못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지직 소리처럼 신경을 긁던 걱정과 불안을 꺼버릴 수 있었다. 작품 관람에 몰두하며 열심히 감탄하다가 나오면, 갑작스러운 풍성한 인풋 덕분에 머리가 띵한 기분이 들었고 미소가 지어지기까지 했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충만해진 기분이었다. 전시를 보러 가는 버스에선 사는 거 참 덧없다며 공허한 표정으로 창밖을 봤다면, 돌아오는 길에는 눈에 총기가 생겨서는 전시의 어떤 부분이 인상적이었는지 짤막하게 메모했다.


바로 이 부분이 쇼펜하우어의 ‘심미적 관조'와 맞닿아있는데, 쇼펜하우어가 제안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로, 어떠한 욕심이나 목적이 없이 예술을 순수하게 느끼며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 온전히 몰입하면 삶의 고통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한참 전시회를 보러 다닌 후, 동네 도서관에서 열리는 쇼펜하우어 철학 세미나에서 이 개념을 처음 배우고는 ‘내가 하던 거잖아?’하고 전시를 보고 나서 들었던 그 충만한 기분의 정체를 알게 됐다. 쇼펜하우어 씨, 저희 통했군요! (저명한 철학가가 제시한 방법대로 알아서 잘 살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우쭐하기도 했다.)


물론 심미적 관조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야말로 ‘고통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일차적인 방법일 뿐이다. 쇼펜하우어 왈, 욕망이 적을수록 고통이 적기 때문에 무언가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내려둬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쇼펜하우어도 욕망을 내려놓았을까?’ 하는 의문과 그의 삶에서 실제로 철학을 실천했는지 검증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이 방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관점에서 쇼펜하우어의 금욕을 소화해 보자면, 지금 날 가장 괴롭히는 욕망은 커리어에 대한 욕망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결국 이렇게 끝났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허탈함과 후회. 보란 듯이 더 좋은 곳에서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조바심. 재밌게 잘 쉬다가도 이런 마음들이 불쑥 튀어나와 휴식의 시간을 망치곤 한다.


이 욕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음과 같이 정리해봤다.  


-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던 건 아니었을까? :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로 자아실현 하지 않아도 된다.


- 그리고 ‘더 좋은 곳'이라는 것도 환상 아닌가? : 고백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더 좋은 곳은 그래도 네이밍이 있는 회사로, 결국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거다. 사실 사람들은 남의 커리어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지레짐작해서 거짓된 욕망을 갖고 있는 거다.  


- 아니, 애초에 커리어가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할까? : 고액 연봉과 엄청난 명예가 목표가 아닌 이상, 커리어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끔 즐기며 먹고 살고 싶을 뿐이다. 먹고 살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일과 회사라면 괜찮다.  


결론적으로, 쇼펜하우어 덕분에 커리어에 대한 욕망은 삶에서 꼭 필요한 욕망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인정하기 쉽진 않았지만, 앞으로의 선택을 위해 필요한 질문들이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해탈에 가까운 ‘무의 상태'에 이르진 못했지만, 적어도 날 괴롭히던 욕망의 실체를 알게 됐다. 앞으로 똑같은 선택 또는 실수를 안 하지 않을까?


어쩐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가장 끌리더라니, 이렇게 다 커서 도움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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