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들으면 좋은 노래 - 단편선 순간들 <독립>
독립하고 생긴 내 은밀한 취미 중 하나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거다. 스포티파이에 “Dance!”라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내가 춤을 출 수밖에 없는 노래를 스무 곡 정도 담아두고, 세상만사 다 잊고 흥을 느끼고 싶을 때 재생 버튼을 누른다.
나름 곡의 순서를 흥의 온도에 맞춰 구성했는데, 베이스와 관악기 소리가 돋보이는 Couch의 <(I Wanted) Summer With You>를 따라 부르며 흥을 끌어올리고, 페스티벌에서 원을 그리며 뛰어놀던 기억을 되살리며 카디의 <Havin’a Good Time>에 맞춰 방방 뛴다. 그러고는 불고기 디스코의 <춤추자 Natural>의 펑키한 리듬에 맞춰 몸이 가는 대로 막춤을 추고, 땀이 난다 싶으면 실리카겔의 <NO PAIN>을 따라 부르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마지막으로는 글렌체크의 <60’s Cardin>을 틀고 양팔을 뻗는 공식 율동을 시작한다. 중간중간 율동을 잊곤 해서 2차, 3차 재도전하느라 땀을 흘리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이 시간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공간을 대관해 파티를 연다고 상상해 보자. 우선, 이 친구들의 흥을 끌어올릴 수 있게 곡을 구성하고, 디제잉을 하듯 적당한 부분에서 끊고 자연스럽게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그다음, 다 같이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뛰거나 떼창을 하도록 유도한다. 또는 <60’s Cardin>처럼 춤이 정해져 있는 곡의 경우에는 ‘글렌체크가 공연을 하던 중에 관객을 지목해 무대에 올라오게 해서 율동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미션을 준다면?’ 같은 상황을 가정한다. 지목당하고는 당황해하면서도 쭈뼛쭈뼛 무대에 오르고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양팔을 쫙쫙 뻗으며 관중을 휘어잡는 내 모습… 생각만 해도 아드레날린이 치솟아 열을 올리며 춤을 춘다.
다만, 혼자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도 항상 가능한 건 아니다. 춤출 힘이 남아 있을 때나 신나는 노래에 충실히 반응할 수 있다. 일터에서 모든 체력을 다 써버린 날엔, 특히 영혼이 갉아 먹히고 있다는 느낌 마저 들었던, 고비의 계절엔 좀처럼 리듬을 탈 수 없었다. 외투를 벗다가도,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다가도 혼잣말로 욕을 내뱉었고, 머리를 헤집으며 괴로워했다. 마땅히 이 상황을 타개할 대안이 보이지 않아 먹고 살려면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워 몸부림쳤고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바닥에 누워 떼를 쓰는 아이처럼 침대에서 “으아아!” 소리치며 버둥댔다. 몸을 일으키기 어려울 땐 손가락만 움직여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었다.
늘 비슷한 순서로 노래를 틀었다. 여유와 설빈의 <거울을 봤어요>라는 노래를 특히 첫 곡으로 자주 듣곤 했는데,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거울을 봤어요
내가 알던 눈빛은
어디로 간 걸까 하고 놀랐죠
사람을 만나도
별 뜻 없는 인사에
웃는 것도 우는 것처럼 보여요
많고 많은 말 그중에 가장 잔인한
말은 사실 난 이 세상에 오직 혼자야
눈이 빛났던 지난날과 어딘가 빛이 꺼진 듯한 지금의 모습이 대조되어 아주 빠르게 침잠했다. 그러다가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고, 눈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눈물을 꾹 참다가 후반부에서는 어김없이 눈물이 터져서 귓가와 베개를 축축하게 적셨다. 깜깜한 심연에서 좀 더 허우적거리고 싶으면 한 번 더 재생하고, 다음으로는 생각의 여름과 강아솔이 부른 <손과 손>을 들었다.
서로에 누워
세상 위로
세상 사이로
세상 바깥으로
이윽고
무사히 아침으로
“세상 바깥으로 이윽고 무사히 아침으로”라는 가사가 들릴 때마다 다시 눈물이 났다. 다음날 출근하기 싫어서 눈물이 난 것도 있겠지만, 나 하나 먹여 살리는 일이 이렇게까지 버거울 일인가 싶은 짜증 났다. 내일 알람이 울리면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지겨워 또 한 바탕 울고는, 견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러 갔다. 그리고는 다음날 6시 40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오늘 제게 인내와 지혜와 행운을 주세요”라고 현관에서 소리 내 말하곤 뚜벅뚜벅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직장 근처에 다 왔을 땐 아름다운 현악기와 “나는 어제와 다른 나”라는 반복적인 가사로 시작되는 김뜻돌의 <요가난다>를 들으며 하루를 열었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뭐든 다 할 수 있어 혼자 사는 게 정말 좋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사실 난 이 세상에 오직 혼자야”라는 가사에 무너진다는 건 어쩐지 모순적이기도 하다. 처음엔 나도 이 모순에 당황했다. 내가 아는 주변 비혼 여성들은 다 당당하고 멋있게 사는 것 같았는데…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기도 했다. 외로움은 한 톨도 느끼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서 유유자적 일상을 꾸려가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현실의 나는 울면서 코 푼 휴지 한 무더기를 버리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즉시 마음을 나눌 존재가 없다는 것, 내게 닥친 힘든 일보다도 혼자 이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에 고독이 밀려왔다.
별안간 이 고독을 연애 욕구로 착각해 흑역사를 남길 뻔했다는 사실도 부끄럽지만 고백한다(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심지어 다른 친구들처럼 ‘나도 결혼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외로움이 극에 달했음을 깨달았다. 외로움이라는 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로맨스를 수단으로 생각하기를 경계해 왔지만, 그 의지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다행히 로맨스로 외로움을 타개하려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그냥 일상을 살아냈고 어두운 시간도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기가 막히게 노래 순서를 배치했더라. 본능적으로 어떻게 이 외로움에 대응해야 하는지 알았던 걸까? 고독을 인식하고 감정을 배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오래 빠져있지 말 것. 계속 고독에 빠져 울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잘 시간이 가까워지면 의식적으로 그 마음의 버튼을 끌 필요가 있다는 것. 오히려 ‘그래, 외로워. 그래서 어쩔 건데?’ 같이 차가운 질문으로 마음의 온도를 낮출 수 있다는 것. 눈물 닦고 또다시 내일을 살아내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 고독은 늘 내 안에 있고, 언제든 다시 거대한 파도처럼 날 덮칠 수 있고 그때마다 같은 과정으로 고독을 지나오면 된다는 것도.
재생되는 음악과 음악 사이 잠깐의 정적 사이에 춤추느라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리기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때로는 통통 튀는 멜로디에 몸이 절로 움직였고 어느 날엔 가만히 누워 선율과 가사에 집중하며 눈물을 닦았다. 집에서 유일한 생명체인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움직임이기도 했고, 음악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단편선 순간들 <독립>의 가사가 참 좋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