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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Oct 11. 2021

유효 기간은 지났지만

letter no.3

학교를 졸업하거나 직장이 바뀌거나 업이 바뀌거나 가정을 꾸리거나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것은 철이 들면서 모두가 알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러나 저는 최근 명백한 계기 없이 아주 천천히 관계가 생명을 다할 때도 있으며 이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냉장고에서 유통기간이 끝난 음식을 정리할 때 감정의 파고가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어쩌면 서운함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 서글프면 서글펐달까요.


아주 서서히 오래된 관계가 빛을 하나둘 꺼트리는 중에 새로운 만남과 인연들이 일제히 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어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가 바뀌자 곧 저의 세상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도 나이대에 맞게 살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내년이면 30대 후반에 진입하게 되니까요.


어릴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선생님들과 선배들은 당시의 아우라를 잃고 나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힘겨운 똑같은 사람이라는 , 비슷비슷해 보였던 동년배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사는 모습이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각자의 고됨이 있다는 , 후배들도 저마다 자신의 삶의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 그리고 당신과 같은 창작자들은 자신의 계를 구축하기 위해 또는 지키기 위해 어려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


이제는 세상 그 어떤 사람들도 동등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시작된 인연들은 전과는 다를 것이며, 그 인연들로 말미암아 저의 세계는 확정적으로 변하겠죠. 저는 그 변화를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환영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멋진 여행을 함께할 동료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변화하는 세계의 어느 지점엔 언젠가 만나게 될 당신도 있을 거라 믿어요.


유효기간이 지난 관계는 생명은 다했을지언정 나무의 나이테처럼 남아 내가 얼마나 살아왔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증거가 될 겁니다. 그래서 슬프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이렇게 미래를 기대하는 자그마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다 괜찮을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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