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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Oct 21. 2021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

letter no.4

꽤 오랜 기간 서울 북쪽 지역의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동거인과 저는 당시 집과 직장의 거리보단 쾌적한 집과 합리적인 월세를 택했습니다.


그 후 수년간 숱하게도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 안에서 흔들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지막 종점까지 퇴근 후의 고단한 몸을 싣고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상행 지하철은 유독 더 춥고 쓸쓸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보다 일을 시작한 후에 지하철 안에서 바라보는 한강이 다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건 도시가 생생하게 마음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기분이며 동시에 마음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출근 시간에 한번, 퇴근 시간에 한번, 강을 건널 때 기관사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와 따스한 방송은 고된 출퇴근길의 작은 재미이기도 했습니다.


회사를 이직하면서 다시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을 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엔 상행에서 하행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입니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기억을 상기하자 건너편 지하철에 지금보다 어렸던 제가 타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오갔던 출퇴근길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해 주었던 한강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윗 단락까지 써놓은 글을 꽤 오랫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끝맺기까지 눈꺼풀이 버티지를 못하더군요. 일을 새로 시작하고 3주가 흘렀습니다. 감사하게도 프로젝트를 곧장 받아서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적응도 순조로운 것 같습니다.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습니다. 올해 안에 마쳐야 할 개인 프로젝트를 다시 상기하게 되었고, 여름 동안 밑그림을 그리던 포트폴리오 작업도 조금씩 진행 중입니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내가 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근거가 되는 재미있는 작업들을 실현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올 초와 비교해서 상황이 너무 좋다 보니 두렵기까지 합니다. 왜 사람은 이렇게 현재에 집중하기가 힘든 걸까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며 되새깁니다. 제행무상. 오늘도 겸손하고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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