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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Mar 21. 2022

기다리는 것이 일

work log no.5

월요일은 출근 가방이 묵직하다. 일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집중력이 버티지 못할 때 그 자리에 내버려 두지 못하고 집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들고 와서 한 번이라도 보면 다행일 텐데.. 무겁게 들고 와서 일주일 간 차곡차곡 쌓인 그것들, 각종 책과 검토자료들을 다시 이고 지고 들고 가는 미련한 짓을 매주 반복하고 있다. (아.. 교과서를 사물함에 내버려 두지 못하고 굳이 가져갔다 가져왔다 했던 학창 시절이 생각남) 가방이 무거워서 어깨가 패일 거 같은데 오늘은 거기에 수첩까지 챙겨 넣었다. 주간회의 전에 보고 내용을 정리하면서 손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다. 


그동안의 각종 기록은 노션이나 굿 노트 캘린더, 아이폰 기본 메모장과 브런치에 분산되어 있지만 수첩에는 딱 한 달 전의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기록. 2월 23일 (수). 순식간에 한 달의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았지만 동시에 지난달과 이번 달의 온도차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확실하게 감지가 되었다. 내 업무의 양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에 따른 나의 생각은 어땠는지. 그리고 이전의 경험과 비교했을 때 어떤 것이 다른지. 본능적으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은 결과로 말하지만 내 삶은 계속 이어지니까.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고, 다음에는 조금 더 나아지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휘갈겨 써놓은 것이라도 남겨야 했다. 프로젝트의 모든 진행 과정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다. 3월 말의 나는 이런 생각하고 있다. 

내가 수많은 퍼즐 조각의 하나였을 때는 누군가가 짜 놓은 일정에 맞추어 최상의 결과를 뽑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직접 프로젝트의 아이템을 선정했고, 직접 작가나 감독과 같은 크리에이터들을 찾아 나서야 했고, 관련한 계약들을 주도하고 있고 또 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의 기약 없는 까마득함을 바라보게 되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비껴보는 것과 직접 마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곳에는 블랙홀이 있었다. 모든 찬란하고 희망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도달할 수 있다는 비전은 죄다 삼켜버리고 불안과 초조함의 자기장을 폭발적으로 내뿜는 블랙홀. 회사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나 역시도 빨려 들어갔을 것만 같은 거대한 혼돈이었다. 이 블랙홀을 마주하면서 나는 기다려야만 했다.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을 언제쯤 알 수 있을지를, 결과물이 언제쯤 나오는지를, 미팅 요청에 대한 답변이 언제쯤 오는지를, 언제쯤 좋은 동료를 만날지, 언제쯤 캐스팅을, 언제쯤 편성 혹은 투자를 받을지. 언제쯤 언제쯤... 


생각해보면 이미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하는 일에서 내 생각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레인지'하는 것이 일의 핵심이고 그러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답답하고 초조하다고 해서 머리를 뽑고 손톱을 물어뜯어봤자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나만 아프고 불행할 뿐이다.


무척 외롭기도 했다. 그 블랙홀은 내 시점에 서 있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에서는 비슷한 온도의 동료를 만났으면 좋겠다. 서로서로가 운명공동체가 되어 서로가 외롭지 않도록. 


팀 하나를 맡은 프로듀서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고 꼭 한 번쯤은 직시해야 할 광경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보자고, 대범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공포스러웠지만 언젠가는 그건 원래 거기 있는 것이라고, 마치 낮과 밤이 돌아오듯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터다. 


스스로를 믿는 것이 우선이다. 그다음에는 일의 순리를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만 한다.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던가? 전 세계의 옛이야기와 우화, 동화 속에서 성급한 녀석들은 항상 낭패를 보았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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