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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May 28. 2023

5월, 끝없는 이야기

브랜드 여정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0. 우로보로스: 스스로를 먹는 뱀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소년은 사실 세계를 구할 영웅이었다. 소년은 멘토와 둘도 없는 동료를 만나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되어 보물을 얻어 돌아온다. 이렇게 모든 신화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지는 영웅서사가 익숙한 아이였던 내게 기묘한 인상을 주는 동화가 있었다. 바로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였다. <끝없는 이야기>의 서사는 익숙한 영웅서사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영웅은 한 명이 아닌 각각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소년이었고, 영웅은 악당을 물리쳐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여왕의 이름을 지어줌으로 세계를 구한다. 작품의 핵심 설정과 주요 서사가 작중에 등장하는 상징적 문양인 '우로보로스'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돌고 있는 뱀과 닮아 있다. 말 그대로 끝없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년이 살던 현실은 환상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소년은 환상 세계에서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소중한 것을 발견해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세계와 두 세계를 대표하는 소년들, 바스티안과 아트레유는 결국 하나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요즘에서야 익숙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평행세계의 수많은 우주 속에 수많은 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업계에 취직하기 위해 준비한 내 자기소개서는 늘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영화가 끝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아이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싫어서 직접 이야기를 만들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딱 10년째가 되어 돌아보니 내겐 참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5월 초의 풍경


1. 질문, 시도, 실패 ♾️

올해 3월부터 차근차근 미지의 땅을 밟는 것을 준비하고 4월은 여정을 시작했다면, 5월은 시도들을 하나둘씩 실시간으로 실패하고 있다. 다만 시도하고 실패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어서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과 같은 감각이다. 여러 업계의 다양한 사람들- 선배, 동료, 후배-을 만나며 생각을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자 실패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들고 있다. 그도 그런 것이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 '나의 사업'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회사를 퇴사하며 겨우 야망을 좀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나만의 일을 모색하고 있다. 그 계기는 성공적으로 자신 만의 브랜드를 론칭한 많은 사람들이 조언했듯 'WHY'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나의 질문은 날카롭다기보단 어느덧 20여 년을 앞두고 있는 하나의 분야에서의 경험 속에서 도출된 생각에 가깝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업계는 극장 상영에 직격타를 맞았고,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냐는 듯 코로나는 극복되었지만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이제야 속속들이 개봉하는 영화들은 모조리 철이 지나버렸다. 투자배급사의 황금기는 종말을 고했고, 한때 OTT 플랫폼으로 그 역학이 대체되는가 했지만 전 세계적인 불황과 한국 내에서의 실적 부진으로 향후를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한 즐길거리가 늘어나고 취향이 분화되며 관객의 반응도 점점 예상을 빗나갔다. 더 나아가 단순 노동자가 기술 발달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인간의 창조적 영역에 있던 직업들이 AI에게 위협받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질문이 시작되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현재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앞으로 우리가 추구할 가치는 무엇일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어쩌면 빠르게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지구의 시계초침 소리를 듣고 있는 시대에 가치 있는 엔터테이닝은 무엇일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까. 


5월의 미션, 5월 중순의 풍경


2. 5월의 미션

나에게 던지는 하나의 질문은 일을 받아서 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일을 창출하고 만드는 사용자이자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였다.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 


주어진 일을 해내기에 정신없이 바쁜 시절을 지나왔다. 변화무쌍한 시대에서 나의 비전은 결국 다른 사람으로든 다른 것으로든 대체불가능한 영역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시 도달했다. 창작의 영역에서, 사람과의 관계의 영역에서, 비즈니스에서 예술가가 되어야 했다. 스스로의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한 조건을 지금에서야 만났다. 회사가 이러한 시도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수 있을 만큼 유연하고, 나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들이다. 또 업계에 대한 고민에 교집합이 있는 결정권자이자 동료이자 선배가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려 했고, 후배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자 했다. 


5월의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단계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패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쨌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 동력의 핵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질문에 있다. 두 번째는 나의 쓰임새와 나다운 것의 조화지점을 찾는 일이다. 그동안 작품을 평가하고 고르는 나의 의견은 매우 정확하고 객관적이라는 평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나만의 시각을 한 단계 더 성장시켜 의견에 포함하곤 한다. (이 시대에 큰돈 들여서 굳이 왜 이 작품이 만들어져야 하는가, 엔터테이닝이 사람 위에 우선하는 상황은 절대 없다, 창작자는 작품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고루한 시대적 가치관을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등) 세 번째, 업계 밖에서 업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현재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것들과 하나를 정리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에 압도되어 있다. 뾰족한 결론이 나지 않고 답답한 일 투성이다. 그래도 어쨌든 나아가야 한다. 책과 정보를 죽어라 뒤지고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만나야 한다. '일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쩌면 나만의 브랜드 여정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5월의 기록들 - 발췌


3. 그 외 기억하고 싶은 5월의 일들

올해 초부터 나의 일은 흔적 없는 길에 스스로 발자국을 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과도 같았다. 5월 현재, 가장 큰 프로젝트는 각본 개발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고, 애니메이션으로 매체 확장을 시도 중이다. 컨셉아트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각 업계에서 전문가들과 만나 공통의 언어를 발견하는 일, 그전까지 부딪히는 일, 서로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해서 모두가 기회가 되는 일 모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다음 프로젝트는 회사를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본을 전달하여 모니터링 의견을 모았다. '재미있다'는 말을 여럿 들었던 것이 일단 마음이 놓였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획 방향을 잘 잡아서 수정하고 있다는 이정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조금씩 길을 밝혀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점점 믿음직스러워지고 있다. 



4. 끝없는 이야기

나는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작가이자 감독이었지만 세상에 나와보자 내가 더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능력은 내게 잠잘 곳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다. 길을 떠나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으며 내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즐거움만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기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부턴가 '현실 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포함한 거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쓰는 동시에 나 자체가 이야기인 셈이다. 진정한 이야기는 끝없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인생, 즉 나의 인생이라는 끝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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