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2013 From 2023 [Part3]
환경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용기가 없다고, 빚이 많으니까.
너는 돈을 꼭 벌어야만 했고, 그래서 기획 피디가 되겠다고 했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진정으로 기획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은 13년으로부터 한참 후.
그때까지 넌 도전하고, 고민하고, 부딪히고 수도 없이 상처투성이가 될 거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확신이 없을 거야.
자신의 일은 어린 시절, 장래희망 란에 쓰는 꿈처럼 확신에 가득차고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 찾아주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누군가가 찾는 나의 일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
그래도 괜찮아. 13년의 너는 운이 참 좋았으니까.
2023년. 나는 알게 되었어.
2013년에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은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을 만들어 낸 것은 2013년에 만난 세 명의 피디님 덕분이고,
그녀들이 나의 가장 놀랍고 거대한 행운이었어.
한 분은 드라마 피디님이자 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분. 너의 글을 알아봐 주셨지. 글을 보면 사람을 안다고. 취업 준비라곤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너에게 처음으로 솔직하게 쓴소리를 해주시며 앞만 보고 나아가라고 하셨지.
다른 두 분은 인턴이 된 네가 어시스트하게 된 피디님이셨어. 한 분은 작가적 재능을 가지신 피디님이셨고, 다른 한 분은 투자 및 제작 파트에서 유능한 피디님이셨지. 네가 두 분 덕에 겪은 다양한 경험들은 10년 후, 아니 그 이상으로 멀리 뻗어나가게 돼.
두 분 피디님의 일을 도와드리면서 그간 인턴들이 하지 않았던 업무를 하게 되었지. J피디님께서 너에게 시놉시스를 맡겼지. 기획 개발하는 아이템의 자료조사를 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시놉시스를 쓰는 인턴은 너밖에 없었어. 누군가는 인턴에게 버거운 일이라고 우려했으나, 넌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고 감사한 기회라고 생각했지. 사무실보다 외부 미팅이 더 많은 분이셨기에 각종 미팅에 항상 나를 동석시키고, 의견을 물어봤던 것도 즐거웠지.
B피디님께서 다른 팀과의 해외 프로젝트 협업 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너도 일을 돕고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어. 거기서 만난 인연은 10년 간 너에게 계속 연관된 사람을 만나게 해. 마치 그 팀과의 협업이 운명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올 거야.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모두 그 순간에 존재했던 네 덕분이지. B피디님께서는 많은 일을 주시지 않았어. 대신 너에게 많은 시나리오를 읽게 했고, 상업 영화계에 있으면서도, 예술 영화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피디님이셨어. 피디님 덕분에 난 영화제를 다닐 수 있는 자유도 누렸지.
그분들 덕분에 놀라게 될 일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몇 년 후에 벌어진단다. 인연의 신비함에 너는 깜짝 놀라게 될 거야. 그 놀라움을 위해 역시 이 일은 비밀로 해야겠어.
운이 참 좋았던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어설펐던 시절에
다른 사람을 굽어보고 이끌 여력이 있던 성숙하고 멋진 분들을 만난 것은.
2013년의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 하나야.
커버 사진
압델라티프 케시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