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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Aug 28. 2023

기획자, 프로듀서가 되어야겠다

2013년 인턴 6개월 차의 기록

2013년 6월 24일

일로써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한국영화를 많이 안 본다고 혼났다. 그래. 결국 내가 있는 곳, 필드는 한국인데 말이다. 배울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무척 즐겁다. 내가 이 단계를 거쳐 진정으로 몰두할 진로를 정하고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난 그때가 무척 기다려진다.


2013년 6월 25일

오늘도 알차게 보냈다. 또 생각지 못했던 것을 배웠다. 아직 미숙해서 일거리를 집까지 안고 가지만 언젠가 나아지겠지. 함께 일하는 분과 퇴근길에 실컷 이야기를 나눴다. 좋은 동료가 있어서 그것도 다행이다. 부족하지만 다들 나아질 거라고 격려해 주셔서 또 다행이다.


의기소침했다가 심장 쫄깃해졌다가 정신없다가 재밌다가 아주 버라이어티 한 하루.


2013년 6월 27일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을 때 어떤 것이 힘든지 알았다. 잘하고 싶은데 잘할 수 없는 처참한 기분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노력해야 해 좀 더.


직장이 아니고 대학원에 온 것 같다. 퇴근해도, 휴일이어도 쉴 수가 없다. 실질적 일로 바쁜 것이 아니라 

잘하고 싶은 내 마음이 바쁘다.


언젠간 잘하게 되겠지? 잘 못하게 되더라도 어떤 결론에 도달하겠지? 그렇게 일이 생활이 되어가겠지?


2013년 7월 3일

피디님께서 오늘 오후 미장센 영화제에 가서 한 섹션 보고 오라고 하셔서 회사를 나섰다. 갑작스러웠지만 무척 기뻤다. 피디님께서 직접 예매해 주신 섹션에 우연히 함께 졸업한 선배의 작품이 있었기에 영화관에서 학교 사람들과 마주쳤다. 선배가 다가와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는 분이 우리의 졸업영화제 영화를 모두 보는 중에 내 영화가 참 기억에 남았었고, 연출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다고 했다. 왜요?라고 물었다. 영화에서 깡다구가 느껴졌다고 했다. 누군가 내 작품을 보았을 때 연출자의 존재를 느꼈다는 사실이 좋았다.


어쩌면 잘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이기 때문에 연출자가 보였겠지. 그런 흠이 있는 영화였지만 보잘것없는 나도 작품에 혼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영화제에서 선보일 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깡다구'가 느껴질 만큼 내가 열심히 했었다는 것을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알아봐 준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인생도 '깡다구' 있게, 넘치는 에너지로 채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하게. 살아가고 싶다. 이런 마음으로 27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2013년 7월 8일

일을 너무 하루 만에 완벽하고 깔끔하게 끝내려 하지 말고 산만하더라도 펼쳐놓고 그때그때 작업하자. 집중한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아이데이션도 해야 되고, 퇴고도 해야 한다. 너무 일에 결벽적으로 굴지 말고 융통성 있게 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하자. 


2013년 7월 12일

영화라는 큰 분야는 같지만, 아직 친하지 않은 기획이라는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조금 시점을 달리 해보았다. '내가 돈을 내고 가서 보는 사람이라면 이런 스토리에 만족할까? 보고 싶을까?' 그랬더니 풀리는 것이 있었다. 현재 나는 완성도에 대한 이야기와는 별개로 아이템의 가능성에 이런 식의 접근을 한 후 의견을 내고 있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줄까'에 집중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내 이야기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의견을 내는 것 외에도 이번 주엔 내가 기획한 아이템을 제안했는데 무참히 까여버렸다. 학교 다닐 때는 그 까이는 한 번이 엄청 힘들었는데 지금은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더라. 아마도 학교 때는 아이템(시나리오)과 나 자신이 하나라고 여겼고, 지금은 따로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재밌기만 하면 되지 않아?라는 생각으로 아이템을 생각해 낼 때 내 태도에 리스펙트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필드에 있건, 상업이건 인디이건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와 이야기가 내세우는 메시지에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통하기 위해서는. 정말 따끔하게 배웠다. 상업적 목적이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상업적 목적이기 때문에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재미까지 붙잡아야 하는 이 필드는 막연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렵고 힘든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아무튼 이번 주에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에 이 아이템 기획이 한몫을 했었고, 앞으로도 매주 해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애써서 해보려고 한다. 끊임없이 까이겠지.... 가시밭길이 구만리다... 하지만 기획이란 것은 재능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지금까지 노력이란 것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해봐야지.


2013년 7월 20일

영화가 사람의 인생이나 사회를 바꾸진 않지만 한 사람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영화의 충격, 기억, 각성 이런 것들이 매력적이다. 영화에 제작자의 성향과 세계관이 반영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를 완성도 있게 만들어 성공시키는데 매진한다. 자기 영역을 꾸준히 넓혀가야 한다. 기획, 작가, 감독 모두. 장르를 넓혀가는 고민을 꾸준히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때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이 절실한 나약한 어린아이였다. 한때 나였던 그 어린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어린아이는 영원히 우리 안에 있다.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모든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확실한 건 내가 많이 본 장르의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수월하고 재미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것 외에도 계속해서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는 아무래도 잘할 수 있는 것을 잘 해내는 것에 급급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지금 당장의 미션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작 한 달 다니고 너무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나 나는 언제나 조급함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도 잘하고 싶고 앞으로는 더 잘하고 싶다. 지금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된다. 하지만 앞으로 잘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을 계속 쌓아가는 이상의 다른 노력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무엇이 되어야 할까, 계속 생각하는 중이다.


2013년 8월 4일

Y피디님과 뜨거운 여름날 함께 해장국을 먹고, 사람들이 모르는 조용한 카페를 알아냈다기에 함께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폈다. 그녀는 종종 내 멘솔 담배를 폈다. 내가 피는 담배는 말보로의 아이스블라스트인데 그녀는 종종 살렘을 하나 달라고 한다. 처음에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살렘은 없고 아이스 블라스트인데요,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자신이 대학교 때 멘솔 담배 브랜드 중에 살렘이 있어서 자꾸 그렇게 이야기 하나 보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의 진로에 대해서 무척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영화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고 이야기를 시작했고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말했다. 넌 이미 정한 거 아니냐고. 감독 아니면 작가라면서, 네가 아직 연출의 꿈을 가지고 있다면 먼 훗날 할 거라고 지금부터 생각하면 영영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왜 자꾸 겁을 내냐는 것이었다. 그렇다. 사실은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길이고 되기도 어렵거니와 고정적인 돈을 벌기도 힘이 든다. 내게 현실적이지 않은 미래라고 해야 할까. 계속 아이템을 기획하고 글을 쓴다면 감독이 될 수도 있고, 그대로 작가가 될 수도 있으며, 기획 쪽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잘 모르겠으면 1년 계획을 우선 세워보는 것은 어떠냐고 했다. 내게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잘할 수 있는 미래는 무엇일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돈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고 내가 내놓은 이야기에 대해 의견을 구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내 담당 J피디님은 넌 어디서 일하다 온 애냐면서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고, Y피디님은 내가 언제나 씩씩해서 좋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정직원은 출입증 띠의 색깔이 주황색이고 나는 인턴이기 때문에 회색이다. 회사 내에서 이미 계급이 존재하고 나는 한 때 회색 띠의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Y피디님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언제 어디에 있든 당당해야 해. 알겠지?'


여름이 깊어져간다. 나는 한껏 촉수를 세우고 내가 느끼고 배우는 모든 것들을 마음에 새기고 깊이 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2013년 8월 11일

일이 많을 때는 시간이 참 빨리도 흐른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 그래서 수요일이 지나갈 무렵엔 '힘들어서 미쳐가네요, 다크 내려온 것이 장난 아니네요, 왜 이렇게 퀭해요. 혼이 빠져나갔어요'란 말을 주고받곤 한다. 함께 일하는 이 사람들이 내게 큰 힘이 된다.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아니 내가 한참 부족하다. 그들처럼 나도 좀 더 형태가 보이는 것들을 진행해 나가야 한다.


오늘은 간단한 자료조사를 마무리 짓고, 우리가 발전시키고 있는 아이템을 가지고 캐릭터를 더 구체적으로 만들고 스토리를 구성해야 한다. 검토 시나리오도 후딱 읽어 치워야지. 영화 카피 만든 것도 문서 정리해야 한다.


참 평화롭게 8월을 보내고 있다. 겉으론 매우 평화롭지만 그 안에서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변화란 것은 불안하고 힘들기 마련인데 평화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2013년 10월 1일

모두가 터져 나오는 비명을 꾹꾹 틀어막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같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서 나는 마치 세상이 몹시 일그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도 점점 힘을 잃고 지쳐가고 있다. 고인 물엔 이윽고 썩은 내가 진동하기 마련인데 훗날 내가 몇 년 이상을 이와 같은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적잖이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물론 일을 한다는 것 자체는 숭고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지독하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10월에 접어들었다. 달력이 바뀌는 새 날이지만 내 마음은 너덜너덜 닳아빠지고 낡은 느낌이다. 이런 날에 점심시간에라도 편한 사람을 만나 먹고 싶은 것을 잔뜩 먹고 싶지만 바람일 뿐이고, 어른이 돼 가면서 너무 잘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원하는 것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을 뻗으면 모든 세상이 내 것이었던 어린 날과 다르게 커버린 나는 아무것도 움켜쥐기 힘들다는 현실 앞에 차라리 손으로 두 눈을 가릴 수밖에 없다.


2013년 10월 7일

몰아치는 바람이 부는 저녁 해변을 걸으며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도대체 왜 제게 이러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제 정말 좀 행복해도 되지 않냐고. 나의 운명을 주관하고 있을 존재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스스로도 말도 안 된다는 사실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행복이란 무엇인지 나조차도 규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힘든 나머지 오들오들 떨며 나는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 않아 새카만 밤바다와 끊임없이 왔다 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해변이 시끌벅적하지 않았다면 나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어둠 속에 영원히 휘감겨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최근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절감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소통부재로 인한 피로 얼룩져있는 것만 같다. 서로의 감정이나 생각을 완벽하게 알 수 없다. 몇 퍼센트의 오해란 불순물이 필연적으로 끼어든다. 다만 그 퍼센티지를 줄이는 것이 능력이 된다. 그런 능력자가 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도 결국은 소통의 문제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재밌고 잘 알아들 수 있게 하는 것. 내 꿈도 내 일상도 다 그런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어렵다. 사는 게 요즘 부쩍 어렵다.


2013년 10월 10일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며)

했던 일.

1) 기획 아이템 개발 회의

2) 시나리오 검토 및 모니터링

3) 개발 중인 아이템 시놉시스 작성

4) 한국영화 분석, 스토리 스터디

5) 해외 합작 기획 개발 참여

6) 제작되는 상업 영화 과정 참여


2013년 10월 24일

모 아이템을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 혼자였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 내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보지 못하는 걸 사람들과의 대화로 생각을 나누면서 보완하는 것이 이 일의 당연한 절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주의해야 할 때는 오히려 의견이 나뉘지 않을 때인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깨달음의 연속이다. 어서 직함을 가지고 일하고 싶다. 많은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진검승부를 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계속 걸어 나가는 것이다. 방향만 알아도 절반은 성공이다. 적어도 움직일 수 있고, 그렇게 계속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으니까. 


나 자신이 점점 단단해져 가는 걸 느낀다. 이전까지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눈을 감고 그저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야 잠에서 깨어 비로소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할 가치관, 인생관을 형성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향해 성장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다. 이 기분이야말로 내가 사는 이유인 것만 같다. 이 세상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13년 10월 26일

일한 지 4개월.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실력으로도 인간적인 부분에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래도 가슴을 펴고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점점 나 자신이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랬었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들에게 소모품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담당 피디님은 잘하고 있다며 나를 독려했지만 그것은 다 한 순간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허무했다. 내가 물론 아랫사람이기도 하고 나이도 한참 어리기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척 미묘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함부로 하는 행동이 내가 단지 아랫사람이라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해도 되는 말단의 소모품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들의 그런 사고방식과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은 종종 부자가 거지 아이에게 적선하는 듯한 묘한 연민의 선의를 베풀곤 하는데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영리하게 그 선의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 답은 다 알고 있는데 이렇게 차갑고 기싸움과 지저분한 감정이 난무하는 판에 있는 것을 꾹 참아내고 있다가 버텨내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하나의 행동으로 전체를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일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어서 나를 진지하게 한 사람의 유능한 존재로 인정해 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어디를 가든 오늘날의 이 기분을 잊지 말아야지.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을 가지려면 능력이 있어야 하고.


2013년 11월 3일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 목요일 저녁. 그러고 나서 제대로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질문만 잔뜩 뽑아놓았을 뿐, 어떤 멋들어진 대답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생각의 정리가 안 돼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인터넷 창을 켰다. 투자배급사 기획팀에서 계약직 5개월째. 1년까지는 일할 수 있지만 계약기간의 반을 달려가고 있는 터라 언제나 희미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이제 어시스트나 잡무가 아닌 제대로 책임지고 할 수 있는 내 일을 하고 싶다는 갈망을 느껴왔기에 지원해 보기로 마음먹었고 이제껏 썼던 자소서 중에 가장 진솔하게 써서 제출했다.


2013년 11월 9일

무엇을 기대했었을까 나는. 어떤 미래를 보고 있었을까. 내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그 말은 꼭 해둘 걸 그랬다. 당신들의 그 질문이 내게 상처가 되었다고. 그 말을 꼭 할 걸 그랬다.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손에 쥔 적이 없을 때는 뭐 하나라도 붙잡길 바랐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자 뭍으로 올라가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아직 네 때가 아닌 거야. 그 말이 내게 위로가 되었지만 동시에 슬퍼졌다. 그럼 나의 때는 언제 오는 걸까?


2013년 12월 5일

어쩌면 취업이 안되던 시절의 나처럼 그저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힘든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 발버둥 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2013년 12월 7일

기획자, 프로듀서가 되야겠다. 일단 움직이자. 꿈도 중요하지만 돈도 중요하다. 누군가는 헛된 꿈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대기업을 추천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내가 가진 일말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물론 다른 기회가 있다면 붙잡겠지만 지금은 공채 준비가 가장 내게 가능성 있는 선택지다. 그러니 믿고 도전해 보련다. 꿈은 그저 부족하지 않은 돈을 받고 영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 자체를 좋아하는 것일까, 영화를 연출하고 싶은 건가. 내 생각에 연출은 욕심이다. 내가 처한 환경이 그 길을 걸어갈 만큼 좋지 않다. 용기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실격이다. 


2013년 12월 22일

곧 한 해가 끝난다. 이곳에서 일하게 된 지도 벌써 6개월째. 얻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여전히 할 일도 많다. 그러면서 마음은 계속 초조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만의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2013년 12월 24일

타인의 이야기를 내 안에 담아두는 것이 좋다. 예민하고 감정에 민감하고 사람을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영화가 너무 좋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면 할수록 협업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2013년 12월 30일

자연스럽게 결론이 났다. 영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분명 영화라는 하나의 큰 그림을 보고 만들어나가는 일은 무척 매력적이다. 다만 그 일이 내 궁극적인 목마름을 채워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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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 <프란시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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