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왕별희>(1993)
다시 꺼내보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 영화가 있다. 영화 <패왕별희>가 내게 그랬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할머니 방에서 온 가족과 함께였다. 어떻게 편집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 연령가의 더빙판이었고 나는 그때도 초등학생이었다. 러닝타임 때문에 함께 보던 가족들이 하나 둘 나가떨어지고 마지막엔 몇몇만 남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텔레비전에서 방영만 하면 다시 보고 또 보았다. 장면 하나하나 너무 강렬해서 마치 나의 기억처럼 각인이 되었다. 계속 더빙판이었다가 삭제되지 않은 오리지널 버전을 보고, 배우들의 원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후에는 도저히 다시 꺼내 볼 수 없었다. 영화가 너무 아팠다. 배우의 안타까운 죽음과는 딱히 상관없었다. 그냥 그 영화 자체가 나에게는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붉고 아픈 기억으로.
홍등가에 데리고 있을 수 없어진 사내아이를 극단에 맡기러 온 창부 어머니는 육손이인 아이를 받을 수 없다고 하자 곧장 아이의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아이는 뒤늦게 깨질듯한 비명을 지른다. 피범벅이 되어 도망치는 아이를 붙잡아 잘린 손으로 지장을 찍게 하고 아이는 엄마를 찾는다. 하지만 문 밖은 눈만 휘날릴 뿐이다.
혹독한 경극 훈련을 받게 된 아이, 도즈는 비구니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나는 본래 여자아이로 태어나'라는 가사를 '본래 사내아이로 태어나'라고 불러 죽도록 얻어맞는다. 손바닥은 피 걸레짝이 되어 파들파들 떨린다. 자신들을 공연에 세워줄 극단장 앞에서 또다시 실수하자 절친한 친구 시투는 친구가 죽을까 두려워 '넌 계집애!!'라며 입안에 담뱃대를 밀어 넣어 잔혹한 폭력을 가한다. 도즈의 찢어진 입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잔혹한 붉은 피의 이미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패왕별희>의 이미지이다. 피는 시각적이며 통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장면이 배우 장국영의 그 어떤 얼굴과 눈빛보다 내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경극 속 정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ㅡ 그것이 살아남기 위해서였든, 평생의 패왕에 의해서였든 ㅡ 모든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하는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후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웃으며 노래를 완벽하게 부르고, 장내시 앞에서 공연을 성황리 마치고, 영문도 모른 채 업혀가 장내시에게 성착취를 당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투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버려진 갓난아이를 주워 돌아오며 유년기 시절은 막을 내린다. 다가올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뎨이를 예감하는 도즈의 얼굴로.
영화 <위대한 유산>과 마찬가지로 사실 어린 시절에 내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은 이 초반 40분가량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히 도즈가 '나는 본래 남자로 태어나' 장면에서 맞는 장면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고 그 최고점은 시투가 담뱃대로 도즈의 입안을 찢는 장면이었다. 어린 시절에 정말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훈련'과 '우정'이다. '훈련'은 내가 기본적으로 영웅 서사와 스포츠와 춤 영화, 소년 만화의 클리셰인 '노력'과 '훈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캐릭터 만의 특별함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 같다. (영웅이 시련을 맞이하듯) 동시에 그 과정을 함께 하는 캐릭터와의 관계를 더 각별한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장터에서의 첫 만남부터 도즈와 시투의 서사가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도 이 초반 40분이다.
영화 본편에 대한 어린 시절의 인상은 그랬다.
'아 진짜 숨 막히는 갈등의 연속이다..'
내가 마치 이들의 극단원이 된 것처럼 안절부절 좌불안석이었다. 어떨 땐 샬로에게 집착하는 뎨이가 지긋지긋했고, 어떨 땐 뎨이가 고생한 것을 몰라주는 샬로가 짜증이 났다. 그러면서 중간에 껴서 그들의 세계를 부순 주샨이 미웠다. 청소년 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를 단순히 인물의 관계에서만 봤었으니까.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시대적 비극이고, 그다음엔 시대적 비극에 휘둘린 개인의 비극이다. 이 모든 것이 경극이라는 소재와 '패왕별희'라는 극으로 풀어낸 것이 정말 감탄스럽다. 불후의 명작이다.
여자를 만나는 샬로에게 뎨이가 화를 낸다. 사부님께서 죽을 때까지 함께하라고 하셨다며. 반평생 함께했으면 된 거 아니냐는 샬로의 말에 뎨이는 말한다.
"안돼! 한평생이어야 해! 일분일초가 모자라도 한평생이 아니야!"
그 바람은 경극 속 우희의 바람이었을까. 앞으로의 격동의 시대를 함께 헤쳐나가야만 함을 암시하는 대사였을까. 하지만 우희가 사랑했던 패왕은 무릎을 꿇는다. 굴복한다. 어찌 그를 탓할 수가 있을까? 샬로는 착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 따뜻한 마음으로 어린 도즈를 구원했고, 그 따뜻한 마음으로 뛰어내린 주샨을 받아주었다. 그랬을 뿐이다.
다시 보았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데이와 주샨의 관계였다. 청뎨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되어 연기하는 장국영과 그 대칭점에서 강인한 주샨을 연기하는 공리의 합이 강렬했기도 했지만 영화 속에 뎨이, 주샨에게 촘촘히 레이어가 씌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대 위 순수한 예술 세계와 세속과 삶의 세계, 엄마와 아이, 창부에 대한 혐오이자 자기혐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살아온 서로에 대한 연민. 두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필사적으로 지켰고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끝내 서로가 지켜내고자 했던 것들을 인정해주었다. 끌어내려지고 짓밟히기 전까지.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은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단순하게는 무대 위의 뎨이와 무대 아래 혹은 샬로의 옆의 주샨이다.
일본군에게 잡혀간 샬로를 구하기 위해 뎨이는 달려가려고 하지만 주샨이 찾아와 부탁한다. 샬로를 도와주면 자신은 샬로를 떠나겠다고. 뎨이는 기꺼이 일본 장교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샬로는 석방되지만 일본 장교 앞에서 노래를 부른 매국노라며 뎨이에게 침을 뱉고 가버린다. 충격받은 뎨이에게 주샨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지만 이내 샬로에게 달려간다. 잡혀온 사람들은 총살을 당하고 뎨이만이 죄책감과 수치심에 허둥지둥 그곳을 벗어 나온다.
이후 샬로와 주샨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뎨이는 연인인 원대인과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늘 패왕과 우희의 모습으로 분장을 한 채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뎨이가 원대인을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바라는 단 한 사람의 패왕을 바라보는 듯하다.
철저히 남자 경극 예인들과 분리된 여자-속세를 보여주는 듯한 프레이밍이자 주샨에게는 또 한 번 자신과 샬로를 갈라놓는 경극이라는 것에 치를 떨게 하는 장면이다. 주샨은 임신 사실을 공표하고 떠난다.
샬로를 일본군에게서 구해내기만을 바랬던 그때의 두 사람의 업보이자 시대적 비극이 서서히 그림자를 드리운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 뎨이는 일본 장교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주샨은 샬로를 비롯한 극단원과 군인들의 싸움을 말리다가 유산을 한다. 오로지 샬로가 위험하지 않길 바랬을 뿐인, 오로지 평범하게 통통한 사내아이를 낳고 살고 싶었을 뿐인 두 사람의 바람은 시대 앞에서 한 없이 나약하다.
주샨은 뎨이의 구명활동에 적극적이다. 샬로에게 뎨이를 구해내면 앞으로 뎨이를 비롯한 경극과는 일절 관계를 끊기로 약속한다. 뎨이와의 관계를 부인하려고 하는 원대인의 마음을 돌려 법정에서 유리한 증언을 확답받는다. 감옥의 뎨이에게 찾아간 주샨은 고문과 협박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말하라고 하며 이 모든 것이 당신과 샬로의 악연 때문이라며 이제 당신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법정에서 뎨이는 자신을 위한 거짓 증언이 무색하게 저항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 자신을 죽이라고 외친다.
뎨이는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며 샬로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목숨을 구걸하며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부정하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어쩌면 뎨이는 경극 자체에는 이념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예술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것이 중화민국이든 일본군이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어디 앞에서든 똑같은 경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 것 같다. 오로지 무대 위에서의 삶만을 위해 부여받은 목숨인 것이다. 주샨은 그의 삶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향해 침을 뱉는다.
국민당이 떠나고 공산당 앞에서도 공연은 이어진다. 이제 이들의 공연은 멋들어진 풍자극 같다. 공연은 똑같은데 관객은 계속 바뀐다. 아편을 끊게 되면서 사경을 헤매는 뎨이가 어머니를 찾는다. 주샨은 보다 못해 그에게 옷을 덮어주며 끌어안고 토닥여 준다.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경극도 새 시대를 맞이하여 변화하고 뎨이는 신세대와 갈등을 일으키다 결국 자신이 데려다가 키운 아이에게 자신의 우희 역할을 빼앗긴다. 무대 뒤에 홀로 남은 뎨이에게 주샨이 가운을 걸쳐준다. 뎨이는 눈물이 차오르지만 절대 품격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주샨의 얼굴에도 많은 감정이 담겨있다. 길고 긴 격동의 세월을 함께 했던 탓일까. 뎨이의 마음을 이제는 아는 것 같은 얼굴이다. 뎨이는 고맙다고 말한다. 마지막 자존심인 듯 가운을 내려놓고 뎨이는 떠난다.
무대에서 끌어내려진 후 더 이상 공연을 하지 않겠다는 뎨이는 샬로에게 말한다. 왜 우희만 죽어야 하냐고. 그 후로 뎨이는 의상을 모두 태우고 떠난다. 그리고 문화 대혁명이 일어난다. 겁에 질린 샬로와 다르게 뎨이는 꼿꼿하고 침착하다.
샬로는 뎨이에게 사내아이를 버리라며 무대 위에 세계에 묶어두었으면서 한평생을 함께할 수 없다고 했다. 뎨이는 주샨에게 자신의 세계의 전부인 샬로를 빼앗겼다. 하지만 주샨은 샬로를 다 가져올 수 없었다. 샬로의 일부인 경극 속 '패왕'은 뎨이에게 있었다. 뎨이는 자신이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견뎠다. 희생했다. 심지어 약으로 버텼다. 주샨 역시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악착같이 살았다. 깃발을 언제든지 바꿔 들었고 아이를 잃었으며 물건은 언제든지 태웠다. 하지만 뎨이의 '패왕'은 무릎을 꿇고 말았고, 주샨의 샬로는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뎨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샨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샨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주검을 발견했을 때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 쳤던 사람은 뎨이였다. 홍위병들 사이에서 그녀가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보검이 뎨이와 샬로에게 의미 있던 보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가슴이 아리다. 뎨이를 보던 주샨의 마지막 얼굴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현재의 나는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창녀로, 예능인의 부인으로, 격동의 시대의 여자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았던 자신을 내려놓은 순간의 얼굴이라고. 그 얼굴은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은 채 순수한 우정으로 뎨이를 바라보는 얼굴이라고. 자신의 인생을 부정당한 그녀가 이제야 무대에서 끌어내려진 그의 마음을 알게된 서로에 대한 연민의 얼굴이었다고.
10~20년 만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뎨이, 샬로, 주샨의 관계보다는 시대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 가엾다는 것이었고, 그 어느 때보다 내가 문화 대혁명 시기에 조롱당하고 서로를 모욕하고 폭로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것이다. 감동을 받은 포인트가 어릴 적, 청소년 때와 너무 달라서 나조차도 크게 당황했다.
이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일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전쟁영화도 아니고 그저 한 나라의 역사를 집약해뒀을 뿐인데 말이다. 보는 내내 동시대의 우리나라 생각도 많이 났다. 그렇지. 인간의 삶은 이렇게 행복은 한순간일 뿐이지.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그런 생각도 했고, 이 세상과 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영화 속의 삶이 남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현대가 비극인지 희극인지 아직 판단은 안되지만 적어도 이웃나라들의 사정은 알 수 있다. 이 순간에도 환경은 파괴되고 있고 전염병은 창궐하고 있다. 이젠 내게 다른 그 어떤 것보다 긍지와 신념이 무너지면 끝인 것을 알고 있다. 이 모든 이유에서 2021년 나는 이 영화가 다른 의미로 내게 아프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체육관에서 뎨이와 샬로는 패왕별희를 연기한다. 체력이 달려 잠시 쉬는 동안 어린 시절 연습하던 곡을 뎨이가 부른다.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태어나'로 부르면서 웃는다. 이제는 경극의 세계를 내려놓은 것일까? 다시 극으로 돌아간 두 사람. 이윽고 뎨이는 패왕의 허리춤에 있는 보검을 꺼내 극 속의 우희처럼 자결한다.
- 유명 영화라 안 본 사람은 없겠지만 다시 보길 권한다. 다른 감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 당시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천 카이거 감독의 유머감각도 보는 재미가 쏠쏠.
- 뎨이와 주샨의 관계에 집중해보면 좀 더 재미있는 해석이 될지도.
샷 하나하나 알알히 붉고 아픈 기억을 주었던 영화 <패왕별희>는 거장이 커다란 화폭에 그린 선 굵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연대기였다. 나는 이제 어릴 적의 인상대로 겁먹지 않고 종종 이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지쳐갈 때, 또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을 때, 꿋꿋해지고 싶을 때, 그럴 때 뎨이와 주샨이 생각나리라. 계속 지켜오던 무대를 내려온 뎨이의 마지막 얼굴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