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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Aug 06. 2021

꿈같은 휴가의 미궁 속으로

영화 <리플리> (1999)

2021년 여름,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이했지만 코로나 확진자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반쪽짜리 휴가를 그럭저럭 보내고 있다. 나는 현재 매일이 휴가나 다름이 없지만 아마도 전염병이 없었더라면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에서 낯선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기 휴가란 좀처럼 없는 것이니까. 아쉬운 마음에 내 기억 속에서 유사 기억을 불러온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가장 강렬한 휴가가 담긴 영화 <리플리>가 재생된다.  


어릴 적에 나는 선망하는 것들이 많았다. 가까이에는 나를 절대로 끼워주지 않는 언니들의 세상이 그랬다. 언니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궁금했다. 금단의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부러워하고 궁금하지 않았을 텐데 언니는 동생이 만지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몰래 언니들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꺼내 보곤 했다. 처음 위치가 어떻게 되어있는 지를 완벽히 기억해서 눈치채지 못하게 되돌려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학을 접하면서 '선망'이란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고자 할 때 강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가장 강렬했던 캐릭터는 단연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이었다. 상류사회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 순수하리만치 일관되었고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청년의 흥망성쇠를 담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크면서부터는 늘 바라는 것들을 목표하며 살아왔다.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하고 난 후부터는 선택한 길에서의 최선을 원했다. 동시에 그 최선과 최악 사이의 괴리가 지나치게 벌어져 곤두박질치지 않게 신중했던 것 같다. 


현대에 계급이라고 하면 역시 물질, '돈'이고 그 '돈'을 대대로 쌓아온 집안일 수록,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수록 더 높은 계급에 속한다. 그래서 그 누구도 우리 사회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고 태어난 수저로 계급을 나누고, 불과 몇 년 만에 내 집을 소유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따라 인생이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부와 성공을 선망한다. 동시에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경멸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그 동력은 부러움이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저


이 영화는 주인공 톰 리플리뿐만 아니라 나 그리고 보고 있는 관객들 모두가 선망하는 것들이 한가득 담긴 영화다. 배경은 눈부신 남부 이탈리아와 로마이고,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금발의 상류층의 자제들이다. 뉴욕에서 온 가난뱅이 톰 리플리만 제외하고 모두가 남부 이탈리아의 휴양지에 어울리는 색의 패션을 하고, 먹고, 마시고, 음악을 즐기고, 책을 쓰고 유유자적한다. 배경에는 항상 재즈가 흐르고, 프로덕션 디자인, 의상,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도 훌륭하고 '고급' 취향이다. 영화에서 가장 핵심 미장센인 배우의 캐스팅도 말할 것도 없다.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아름다운 여자 한 명에 남자 둘의 방탕한 나날들이라는 삼각 구도만 해도 다양한 영화가 떠오른다. 물론 이 영화에서 구심점은 남자인 '디키'이지만. 그런데 포장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의 욕망을 빼닮은 섬찟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톰 리플리도 선망했다. 사랑했다. 디키 그린리프를. 결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눈부신 휴가를, 아름다운 연인과 방탕한 자유와 그 모든 것을 용인하게 하는 매력을 가진 그를. 하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톰은 결코 디키를 가질 수 없었고 디키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이 톰이 미궁 속에 갇히게 된 이유였다.


톰 리플리의 피아노의 선율에 지독히 섞여 들어간 디키라는 재즈


뉴욕 대도시에서 흔히 볼 것만 같은, 여러 번 마주쳐도 인상에 남지 않을 것 같지 않은 평범한 남자 톰 리플리.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대단치 않은 그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않은 재능이 있다. 그 재능도 딱히 별것 없어 보인다. 고작 다른 사람 흉내를 잘 내고, 머리가 좋아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 정도? 이번에도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돈을 좀 벌어보려고 했던 것뿐이다. 외국에서 망나니처럼 살고 있는 선박 재벌 그린리프의 아들을 설득해서 데려오는 일이다. 톰은 먼저 디키 그린리프가 좋아한다는 재즈를 열심히 공부한다. 친해지려면 환심을 사야 하니까. 디키 그린리프와 연인 마지 셔우드가 지내는 몬지벨로에 도착해 망원경으로 그들을 관찰한다. 우연을 가장해 프린스턴 대학동창이라며 디키에게 말을 건넨다. 그때까지 톰은 용의주도했고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남부 이탈리아 몬지벨로에서 유일하게 새하얀 알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그린리프의 흉내를 내서 디키의 주의를 끌고, 준비해두었던 재즈 LP판을 보여주고,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디키의 환심을 산다. 디키가 톰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톰은 디키와 함께하는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부유하고 자유로운 달콤한 휴가에 점점 젖어들어가게 된다. 점점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순수하고 청아하게 울려 퍼지던 톰의 피아노에 거칠고 예측할 수 없는 즉흥적인 재즈의 선율이 섞여 들어온다. 디키와 마지와 함께 하고 그린리프가 아들을 데려오기 위한 경비로 보내는 돈으로 생활하는 부유한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디키가 마지를 두고서 여자를 마구잡이로 만나는 난봉꾼임을 알고 있어도 톰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런 비밀을 지켜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이 넘볼 수 없는 디키와 같은 상류층의 '프레디'가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자 톰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아니 위협했던 것이 아니다, 프레디는 톰이 원래 있었던 자리로 끌어내리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톰 리플리의 욕망의 행방 - 그는 누구를 흉내 내고 있나?


예술이나 이야기 속에서 아름다운 존재들은 그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사람을 휘두른다. 항상 이기는 특권을 타고난 자들이다. 그들은 잔인하도록 변덕쟁이고 냉정하다. 디키 그린리프도 마찬가지다. 디키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가지만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를 사랑해서 스스로가 파멸하게 되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나는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에서 톰과 디키가 처음부터 몰랐던 사이였던 것으로 각색한 것이 이러한 비극과 아이러니를 더욱 강화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르네 클레망 감독 버전의 <태양은 가득히>의 경우 오래된 사이는 지독한 애증이 밑바탕에 있기에 톰이 리플리를 결국 죽이고 마는 영화적 극성이 떨어진다. <태양은 가득히>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충실히 따랐다면 그럴 만하다. 소설의 독자였다면 그 지독한 애증의 역사와 치밀하고 촘촘한 감정의 디테일을 읽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프레디의 등장을 시작으로 디키의 톰에게로의 관심은 점점 꺼져간다. 자신에 대한 집착,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고 따라 하는 소름 끼치는 행동, 그 모든 것에 질린 디키는 관계의 종언을 고한다. 넌 '재미없다'며. 톰은 자조한다. 자신은 디키 앞에서 다른 사람인 척한 적 없는데 디키의 얼굴은 수십 번이고 바뀐다. 어떤 것이 진짜 디키인지 알 수 없다고 비난하는 톰에게 디키는 너는 누구냐며 가난뱅이, 빈대, 거머리라고 모욕하고 다툼 끝에 톰은 디키를 살해한다.


묘하다. 보트 위에서 다툼 끝에 톰이 디키를 죽이고 망망대해에서 핏물 위의 디키를 끌어안고 있는 톰 리플리의 씬. 이 씬에서 톰은 디키에게 '체스를 두던 날 밤'에 대해 언급한다. 분명히 너는 알고 있었다고. 그날 밤은 두 사람이 속내를 털어놓으며 유례없이 친했던 날이며, 장면적으로는 톰이 디키에게 섹슈얼한 욕망의 시선을 드러낸 씬이다. 그리고 그 눈빛을 디키는 받아주진 않지만 알아챘다. 그렇다면 톰 리플리는 남자를 사랑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디키가 성별을 넘어서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걸까?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그리고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막연히 톰 리플리가 디키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디키를 연기한 당시 주드 로는 그리스의 남신이 부활한 것처럼 아름다웠고 영화 전체 러닝 타임에서 40분가량 밖에 나오지 않는데도 이 영화의 전부를 상징하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더불어 영화 후반부에 톰에게 피터라는 파트너가 생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동성애자라고 못 박게 된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때, 혹은 입 밖으로 꺼낼 때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고 퇴색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의 묘미는 이처럼 언어로 확정 지을 수 없는 경계의 인상과 상징들을 남겨둘 수 있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톰이 디키를 연인으로서는 물론 디키라는 존재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는 것을 넘어 디키를 마치 자기 자신처럼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을 덧붙이게 된다. 기차 창에 비친 디키의 잠든 옆얼굴의 자신의 정면 얼굴을 겹쳐보는 톰 리플리의 욕망은 복합적이다.



톰의 욕망을 쫓아가 보면 그는 신분 상승에 목을 매었던 것은 아니다. 디키의 모든 것이 탐났던 것도 아닌 것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디키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은 자신이 디키를 죽인 것을 감추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고 바랬던 디키가 된다. 난봉꾼 생활을 접고, 마지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신뢰하는 친구인 톰 리플리만을 곁에 두는 디키 그린리프다. 왜 디키는 특별한 모든 것을 갖추었으면서 나를 포함한 누군가를 필연적으로 아프게만 하는가? 알리바이를 남기기 위해서이겠지만 톰이 디키에게, 디키가 된 톰이 톰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장면은 놀아줄 사람을 찾지 못해 1인극을 하는 아이처럼 가련해 보인다. 그 1인극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디키 그린리프와 톰 리플리는 결코 한 장소에 함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톰은 자신이 원하던 디키를 연기하며 디키가 되었지만 영영 디키와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 자기 자신 즉, 톰 리플리와도 만날 수 없게 된다.



톰 리플리는 자기 스스로를 미궁 속에 가두었고 그곳에서 영영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자기가 만들어낸 미궁 속의 괴물을 만나 죽는 수밖에 없다.



모멸감과 죄책감 그 끝의 진혼곡


일상생활에서는 모욕과 모멸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 무의식적 모멸의 가능성과 함께  짚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순전히 나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점이다.

- <모멸감> 김찬호 저


디키와 마지와 함께 보낸 몬지벨로에서의 나날들과 로마에서 디키와 단 둘이 보낸 나날들로 톰은 자신이 디키의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프레디는 그것이 그저 희귀한 것을 보면 관심을 보이는 디키의 변덕일 뿐이라는 걸 일깨운다. 아무리 여러 여자를 건드리는 난봉꾼이라도 결국 디키는 마지에게 돌아가며, 아무리 여러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형제라고 불러도 결국 디키는 흥미를 잃고 떠나는 것이다. 그의 곁에 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런 그의 성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비슷한 류의 방탕하고 부유한 상류층의 친구뿐이다. 이를테면 프레디 같은.



프레디는 톰을 향한 조롱과 경멸을 감추지 못한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무리에 낀 것도 불편한데 주제 파악까지 못하고 있다. '디키, 아무리 심심하다지만 이번엔 또 무슨 해괴한 짓이야?!' 그의 표정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끝에 톰은 디키에게 먼저 죽임 당한다. 사실 그의 존재가 먼저 디키의 입에서 살해된 것이다. 모욕과 경멸, 모멸감으로 인한 수치심은 존재를 죽음과 같은 상태로 만들고 곧 폭력으로 이어진다. 톰은 참지 못하고 디키를 친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이젠 끝낼 수밖에 없다.  


톰이 디키를 죽이고 난 후 영화의 중반부터 톰은 살인 행적을 감추기 위해 디키의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주변의 의심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하고, 경찰 조사를 받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하면서 영화에 스릴러 요소가 강해진다. 오리지널 캐릭터인 메러디스가 중후반부의 긴장감 강화에 크게 기여한다. 톰을 디키로 알고 있으면서, 진짜 디키를 알고 있는 상류층 인사들과도 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 살인자인 톰이 붙잡히지 않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디키를 찾아 헤매는 마지를 보면서 캐릭터인 톰보다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가 더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살인자를 응원하면서, 순수한 피해자인 마지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상황 끝에 아이러니하게도 톰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고 뿐만 아니라 그린리프의 감사와 디키 몫의 재산 일부까지 받게 된다.



마지의 의심까지 받게 되자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방법은 모든 죄를 짊어지고 디키가 자살하는 것 밖에는 없다. 톰은 디키를 완전히 세상에서 말소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비밀을 넣어둔 지하실의 열쇠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피터에게 달려간다.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라크리모사는 마치 이제야 울리는 디키의 진혼곡처럼 들린다.



영원한 휴가의 미궁 속으로


이제 톰 리플리는 뉴욕의 톰 리플리와 비교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부유해졌고, 그를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고, 그들은 함께 여행 중이다. 두 사람은 연주가이면서 작곡가로 완벽한 한 쌍이다. 하지만 그 배 위에서 메러디스를 다시 만나면서 톰은 영원히 자신이 만들어낸 미궁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의지하고 있고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피터마저 그 미궁의 일부일 뿐이다.

톰은 피터에게 고백한다.



I know. I'm lost.

알아요, 나도 길을 잃었어요.

I'm gonna be stuck in the basement, aren't I,

난 지하실에 갇혔어요, 그렇죠.

that's my, that's my - terrible and alone and dark - and I've lied about

그게 내 운명이에요. 끔찍하죠. 외롭고, 어둡고. 난 거짓말했어요.

who I am, and where I am, and so nobody can ever find me.  

내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 이젠 아무도 날 찾지 못해요.


I suppose I always thought - better to be a fake somebody than a real nobody.    

Tell me some good things about Tom Ripley.


미로는 들어가는 길과 나가는 길이 있지만 미궁은 들어가는 길만 있을 뿐이다. 들어간 길의 끝에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 괴물이 되어버린 톰 리플리는 피터마저 살해한다. 곡명이 'Lullaby for Cain'으로 의미심장한  음악이 흐르며 엔드크레딧이 오른다.



Et Cetra


- 여름휴가철에 추천하는 영화. 남부 이탈리아는 아름답고 피와 스릴러는 여름에 딱인 장르니까.

- 앞서 언급했듯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 안소니 밍겔라의 품격 있는 연출, 다채로운 사운드 트랙.

-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펠트로, 케이트 블란쳇, 작고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외 조연진들의 연기와 상류층 남녀 패션의 대향연.

- 작중 촌스럽고 가난뱅이라고 지적당하는 맷 데이먼도 아메리칸 웰링턴의 클래시컬 안경 룩이 멋있고, 그가 상류층의 복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주드 로와 다르게 영민하고 이지적이며 웃으면 소년 같은 특유의 마스크도 매력적이다.




이 글을 쓰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생각을 덧붙이며 마무리한다.

과연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가지는 것은 한 개인에게 행복일까 불행일까?

상상력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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