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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Aug 22. 2021

단 하루, 여자의일생

영화 <디아워스> 2002

아주 오래전부터 내 감정과 고통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족 중에서 그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았을 때부터, 

학교에서 맞지 않는 친구들과 그럭저럭 지내야 했던 시간들을 지나

대학에서는 제 물을 만난 듯했지만 각자의 개성이 강해 서로에 대한 질투와 평가로 혼란스러웠고, 

사회는 정글이나 다름없어 그 누구도 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영화와 소설이 나를 위로했다. 가끔은 내가 쓰는 글 속의 인물이기도 했다. 

우연히 붙잡은 영화의 장면과 책의 한 구절이 마치 내 마음을 모두 들여다본 것만 같을 때 

이 막막한 세상 속에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느끼고 안도했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유독 몹시 아팠다. 

이십 대야 말로 내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상처 받기 싫었고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큰 갈등 없이 살았던 십 대와 다르게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만큼 입을 더 열었고 가시를 바짝 세웠고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 매사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내 마음의 고통과 우울의 이름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많은 책을 접했다. 

전혜린, 실비아 플라스, 버지니아 울프, 수전 손택, 시몬 드 보부아르....

접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몇몇을 제외한 서적들은 당시에도 어려웠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간 그녀들에게서 답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며 당시에 어울리던 언니들과 나누던 책들이었다. 

일기장에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의 니나 부슈만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소냐가 몇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그녀들처럼 절망 속에서도 강인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하고 싶었다.


영화 <디 아워즈>는 또한 바로 그렇게 깨지고 부서지며 나를 알아가던 시절, 

나조차도 내가 낯설었던 그 시절, 그렇게 내 곁에 있어준 영화였다.  


 뉴욕에서 클래리사가 아침에 꽃을 사는 장면을 좋아한다

영화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클래리사는 딸 줄리아에게 어느 날 아침에 대해 말한다. 

그날은 너무 눈부셔서 마치 행복의 시작인 것만 같았다고.

하지만 그건 시작이 아니라 그저 순간일 뿐이었다고. 



한 여자의 단 하루, 그리고 일생



얼마 전 왓챠 익스클루시브에서 추천받아 보게 된  <Why Women Kill> 시즌1을 보고 곧장 이 영화가 떠올랐다. 세 시대를 넘나 든다는 것. 주인공들이 여자들이라는 것. 여자들이 공통적인 키워드를 가지고 각자의 생애를 공유하듯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 유사하다. 그 드라마의 키워드가 '여자의 일생'과 '살인'이었다면 영화 <디 아워스>의 키워드는 '댈러웨이 부인'과 '단 하루 안에 보여주는 여자의 일생'일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이라는 소설이고 그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영감을 받아 쓰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소설가와 소설을 다시 재해석하고 직조한 소설을 영상화한 기묘한 영화다. 마주 본 거울이 영원히 굴절되는 것처럼 마치 허구와 실제가 뒤섞인 세계다. 



그 세계 속에 세 여인이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래리사 본. 

세 여인들은 각자의 삶 속에 얽매여 있다. 당연하다. 삶이란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 있음을 의미하니까. 그렇기 때문인지 그들이 사는 세상은 색채마저 다르다. 초록빛 흙내음이 나는 영국의 리치먼드, 노란 햇살이 나른한 로스앤젤레스, 대도시의 차가운 푸른빛이 감도는 뉴욕. 모두가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며 영화가 시작한다. 시종 흔들리는 그녀들의 감정과 심장박동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필립 글라스의 음악과 함께.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세 인물에게 동시에 이입해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버지니아일 때 나는 내 집에 있었으나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소외되고 속박된 사람. 내 방에 앉아 있었으나 그 마저도 불안한 죄수가 된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였다. 신경이 거슬렸다. 로라가 되자 집중이 안되고 짜증이 났다. 바깥에서 내는 소음을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고 싶었고, 아이와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가 은연중에 강요처럼 느껴졌다. 그냥 제발 내버려 두었음 했다. 불안하고 예민했다. 클래리사가 되자 리처드에게 몇십 년 동안 집착하고 있는 자신에게 질린 사람들의 눈빛을 모른 척하느라 지겨웠고, 리처드를 사랑하면서 지긋지긋하면서 놓지 못하는 자신이 지겨웠다.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바로 그녀들이! 그리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연출과 필립 글라스의 음악이 바로 그렇게 완벽히 관객을 인물에 일체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어쩌면 완벽히 일체감을 느끼게 했거나 완벽히 튕겨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불편한 감정을 심어주고 인물들의 비언어적인 눈빛들, 행동들은 완벽히 해석이 되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다 해소되지 않는 물음표, 구멍, 여백들을 남긴 채로 진행된다. 마치 그게 삶이라는 듯이.  




그녀들의 오늘은 단순하다. 그리고 인물들에게도 그리 특별한 날은 아니다. 버지니아는 오후에 언니가 아이들과 방문하기로 되어 있고, 로라는 남편의 생일이라 아들 리치와 생일 케이크를 만들 예정이다. 클래리사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 리처드의 시상식 축하 파티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 날은 그녀들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다.



죽음과 삶 그리고 남은 사람들


버지니아는 조카와 함께 죽은 새의 장례를 치러 준다. 죽으면 어디로 가냐는 물음에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버지니아는 죽은 새 옆에 살포시 누워서 죽은 새의 평화로워 보이는 죽은 눈을 바라본다. 유일하게 의지하던 언니 바네사. 자신을 이 시골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주길 바랬던 바네사는 금세 런던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자신은 지겹다고 말하지만 버지니아는 그리워 마지않는 저녁 파티 약속이 있다며. 모두가 자신을 이곳에 못 박아 두고 여기에 있어야만 건강하다며 자신을 위하는 말이라고 한다. 버지니아는 배신감에 바네사에게 키스한다. 사랑이라기보다는 항의의, '바로 언니가 생각하듯이 나는 그래 미쳐 있고 치료를 받아야 하지 그렇지?'란 반항의 의미의 키스다. 바네사는 떠나고 버지니아는 방안을 서성이다 집을 나간다.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역에 앉아 있지만 남편 레너드가 쫓아와 버지니아를 몰아세운다. 모두 당신의 건강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것이지 않냐고. 환청과 발작. 두 번의 자살시도.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레너드의 호소에 버지니아는 이곳에 있는 것과 죽는 것을 고르라면 자신은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 아픈 사람도 치료법을 자신이 고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자신은 런던에서의 삶이 꼭 필요하다고 레너드에게 간절하게 말한다. 레너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마음이 찢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국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버지니아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더욱 참담하다. 배고프지 않냐며 서로 웃으며 여느 부부처럼 집으로 돌아간다.



로라는 완벽한 남편의 생일 케이크 만들기에 실패한다. 이웃집 부인 키티가 찾아와 자신의 자궁의 문제를 알리며 임신이 안된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린다. 아들에 둘째 아이까지 임신 중인 로라에게 다 가졌다고 말하는 키티. 로라는 다 가졌지만 행복하진 않다. 그런 것보다 울고 있는 키티를 달래주고 싶다. 그녀에게 자기도 모르게 키스한다. 그 순간 깨닫는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절망이다. 완벽한 가정이라 생각하는 남편.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들. 뱃속의 아이. 이 모든 것을 돌이키기엔 늦었다. 죽음 밖에는.


리처드를 데리러 온 클래리사 앞에서 리처드는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말하고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버지니아는 댈러웨이 부인의 소설 속 주인공의 최후를 비극으로 끝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이유를 묻는 레너드에게 버지니아는 그래야만 남은 사람들이 소중함을 알 수 있다고 대답한다. 



삶을 지독히 사랑하여


십 대, 이십 대의 내게 영화 <디 아워스>는 불안, 우울, 예민, 몸속에 영혼이 갇힌 것 같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감정들을 표현해낸 장면으로 기억된 영화였을 뿐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었던 영화는 아니었다. 음악처럼 기억된 영화라고 해야 할까.


깨지고 부서지고 아팠던 이십 대 시절이 지나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알게 된 사실은 결국 사람이란 겪어보기 전에 알 수는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모든 질문의 답은 시간이 지나니 자연히 알게 된 느낌이다. 결국 세월이 나를 알게 했다. 혼란의 이름이 무엇이었노라고 명확히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 당시의 질문들을 어느 순간 파도가 쓸어가듯 모조리 쓸어가 버렸다. 


그처럼 삼십 대 중반에 다시 본 영화 <디 아워즈>는 조금 명확한 테마로 내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세 여자의 지독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생의. 삶에 대한. 


버지니아는 아마 점점 망가져가는 자신도 견딜 수 없었고, 자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레너드를 바라보고 있기도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멈출 수가 없을 때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끝도 없이 엇나가는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만 주게 되는 때 내가 미친 듯이 싫어져서 자기 혐오감과 자괴감으로 토하고 싶을 때. 

여자도 글을 쓰기 위해서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실제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여성이 활동하기 힘든 세상에서 지식인이자 문인으로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그런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에, 남편 레너드를 경애했기에,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으리라. 사랑했으므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로라는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목숨을 끊을 만큼 모질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버리고, 남편을 외면하고, 가정을 깨고, 모두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는 삶을 지독히도 사랑했고 그 삶을 지켜낼 만큼 강인했다.


그리고 클래리사 본. 우리의 댈러웨이 부인. 어렸던 날 아름다운 추억에 눈이 멀어 평생을 끌려다닌 안타까운 여자. 그녀는 곧 책 속의 댈러웨이 부인으로 비유되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남은 날의 소중함을 깨닫는 인물이다. 갑작스러운 리처드의 자살로 얼이 빠진 그녀 앞에 리처드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긴 어머니 '로라 브라운'이 방문한다. 남편도, 리처드도, 리처드의 여동생도 모두 죽었다. 자신 혼자만 살아 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 후회한들. 후회한들 어쩌겠냐고 말한다. 결국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아무도 용서하지 않더라도 그 모든 걸 감내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는 웅장하고 고귀한 고백을 노년의 로라는 고요히 속삭인다. 


클래리사는 그제야 자신을 돌아본다. 리처드에게 헌신했던 오랜 세월. 애인도 딸도 소홀히 하고 심지어 자신의 삶까지 그의 소설에 마구 까발려지며 소홀하게 대했다. 열여덟의 클래리사와 열아홉의 리처드. 아름다운 그날의 아침. 잊지 못할 추억 속의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가 서로를 망령처럼 붙들어 왔던 것이다. 시계가 제대로 돌기 시작한 듯 클래리사는 이제야 자신의 파트너 샐리와 마주 보고 키스한다. 여전히 깨질 듯이 불안하고 섬세해 보이는 노령의 로라 브라운을 사연을 알고 있는 클래리사의 딸 줄리아가 포옹한다. 그녀 역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인 것이다. 로라는 줄리아의 포옹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강물처럼, 시간처럼, 세월은 이어진다. 

버지니아 울프는 죽었지만 그녀의 숨결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던 로라 브라운의 삶으로 이어지고, 댈러웨이 부인의 화신과 같았던 클래리사 본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만든 것은 죽음이 아닌 자신의 삶을 택했던 로라 브라운이었다. 그리고 로라 브라운을 포옹하는 줄리아까지.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았던 여자들은 마치 하나의 줄기를 타고 내려온 계보 같다. 그런 매우 아름답고, 버지니아 울프를 위한 영화이자 삶에 대한 깊은 찬사가 담긴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이 영화를 그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 태어난 이상 우리는 별개의 우주를 지닌 각각의 생명일 뿐이다. 

행복은 순간일 뿐이지만 도달하는 과정은 길다. 그러므로 삶이란 과정으로 봐야 옳다. 

삶의 최소 단위는 하루다. 단 하루. 모든 삶을 사랑했던 이들이 살아간 하루. 

그 하루를 우선 사랑해보기로 했다. 지독하게 저주할수록 삶은 엉겨 붙어 오는 것 같으니까. 

하루가 쌓여 세월이 된다. 세월이 지나면 또 조금은 편안해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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