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th Point Sep 01. 2015

동구릉 바라보기

일상의 편린들, 단편으로 적다


새로운 아침이다. 


그의 머릿속은 하얀 포말만 부서질 뿐이다. 그의 기억은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고 본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을 헤맬 뿐이었다. 새로운 아침, 햇살만 빛날 뿐이다. 새로 들어온 문자 하나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오빠 저 오늘 XX학교 가요. 거기서 봐요 ㅋ'


무슨 문자일까? 역시나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는 새롭지도 않다. 이렇게 시작되는 하루라서 그날 일어난 일들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는 샤워실 문 앞 노트에 적어놓았다. 매일 샤워하러 가는 길에 지난 일들에 대해 읽어보곤 한다.  지난날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몇몇 사건에 대해서만 적어 놓았을 뿐이다.

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샤워하러 가는 길, 오늘 아침에 온 문자는 일주일 전의 그 문자와 문장 패턴이 비슷하다.



 '아 진짜 오빠 같은 남자를 만났어야 하는데' 

이 두 문장의 특징은 뒷 문장이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뒤에 문장이 더 있지만 생략되어 있는 특유의 비슷함이 존재한다. 기억을 잃고 난 이후 그는 문자의 뒷면에 숨겨진 내용을 읽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된 것이다. 오늘은 XX학교로 가야 한다. 이 문자를 보낸 사람을 만나 그녀가 어떤 관계에 속해있는지 누구인지 물어야 하니까 말이다.



화사한 그녀였다. 


표정 하나 살아있는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3월의 하늘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녀는 10년이 더 지난 이야기를 하였고 그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표정과 그녀의 뒤에 예쁘게 핀 목련과 벚꽃들이 그녀와 오버랩되었다. 이제 그에 대해 물어볼 시간이다.





하지만, 문득 그는 오늘은 본인에게 주어진 소풍이고 싶었다. 


잠시 그에게 주어진 소풍이라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정반대의 푸르름, 얼굴에 스치는 봄의 기운 때문에 그는 사무치게 소풍날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오늘을 즐기기로.

그녀 역시 시간이 정지한 듯 미소 지었고 그녀는 문득 놀이동산이나 동물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문득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커피숍을 벗어나 왕릉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동구릉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소인 그곳, 바로 동구릉이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묻힌 건원릉을 포함해 9개의 릉이 있는 동구릉, 그녀와 함께 이 봄날 그는 조선시대의 기억을 함께 거닐고 싶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기억상실을 맞이하여 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우쳤다. 찰나에서 억겁을, 억겁에서 찰나를 찾을 수 있기에 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하루라고 생각하면 맘이 편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는 매일매일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중에 오늘은 그에게 더욱 특별한 날이었다. 그녀와 헤어지며 돌아선 그녀 뒤에서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그녀와 왕릉을 걷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왜 그녀와 더 함께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놀러 가지  않으련'이라고 물어보지 않은걸 후회했다. 그녀는 더 이상 함께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뻤다. 그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화사한 봄날 조선시대의 그 어느 때로 가서 산책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그러한 문자 패턴이 오게 된다면 그는 꼭 소풍을 떠날 것이다.                                                                                                                                                                                                                                                                                                                                                                                           



그는 침대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일 일어나서 모든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그녀의 표정 하나 하나의 느낌만은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크로스코 바라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