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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th Point Jan 21. 2016

<시간론> 시간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여행

다케우치 가오루가 바라본 시간의 역사, 시간의 본질을 직시하다


평소에 궁금했던 '시간',
30대 후반에 이르러 한번 재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시간>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가 커감에 따라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당연시 여기게 된다. 왜냐면 더욱 복잡한 것들이 많아지니까 말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작가들 중에 우주론, 천문학, 양자역학, 일반 상대성원리 등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작가가 드물었다.  바다 건너 일본 작가들이 이런 분야를 쉽게 잘 풀어쓰기에 살펴보다 알게 된 작가가 다케우치 가오루(たけうちかおる)다. 최근 <시간>에 대해 머릿속에 재정립을 하려고 찾다가 다케우치 가오루 책을 선택했다. 다케우치 가오루는 <시간론> 이외에 <양자론>, <우주론>도 집필했으나 양자론이나 우주론은 워낙 다른 책들이 뛰어나 굳이 찾아 읽지 않아도 된다. <시간>에 대해 스스로 한번 다잡고 싶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도 되는 책이 바로 <시간론>이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의 관념적 시간 말고 실질적으로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시간이라는 단어에 대한 질문에 1년 365일 24시간 60분 60초 등의 단어가 조합된 답변이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측정하는 단위에 불과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관념적으로 시간에 대한 측정단위를 시간과 동일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 너무나 막연하기에 이것을 깊게 파고들면 '시간' 속에 빠질 수 있기에 이 시간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시간 단위에 더욱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개념틀이다. by 칸트


<시간론>을 살펴보자. 1년이 365일로 된 이유, 태음력-태양력에 대한 설명, 마야인들의 3가지 달력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고대인이 어떻게 시간을 인식했는지에 대해 적어놓았다. 시공간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공간은 물체를 담는 그릇이라는 직관적인 작가의 주장이 인상적이다. 시간에 철학에 대한 부분도 나오는데 칸트가 바라본 시공간이 참 이채롭다.


"공간과 시간은 인간이 가진 감성의 형식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공간과 시간은 우리 뇌가 외부 세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해주는 개념틀이므로 물리계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외부 세계에서 들어온 정보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뇌 속의 '필터'로 걸러 해석하는 것이다.
-칸트 <형이상학 서설>


철학 쪽에서는 칸트의 이 주장을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즉, 불변의 진리이던 천동설이 무너지고 지동설로 이동하며 세계관의 변화가 온 것처럼 시간과 공간은 외부가 아닌 인간 내부에 있다는 혁명적 사고의 유연성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몸집이 클수록 체감시간이 느리게 흐를까?


또한, '스케일 법칙'을 언급하며 몸집의 크기에 따라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동물의 크기와 심장박동수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를 통해 코끼리와 쥐는 거의 비슷한 '일생 체감시간'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청각이 시각보다 정보처리 속도가 빠르다?


저자는 빛 정보가 눈에 들어와 망막에서 화학반응을 거쳐 전기신호로 변환시켜 후두엽의 시각중추에서 자극하는 것이 소리가 고막을 진동시켜 측두엽의 청각 중추의 처리 속도보다 느리다고 언급한다. 청각의 반응속도는 0.13초, 시각의 반응속도는 0.17초라고 한다. 이를 통해 빛의 전달 속도(3억M/1S)가 소리 (330M/1S)보다 약 90만 배 빠르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는 시각보다 청각이 더욱 빨리 전달된다. 시각과 청각의 다른 반응속도 때문이다. 그 경계가 12M인데 12M보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청각이 12M를 넘어서면 시각정보가 더 빨리 인지되는 것이다.


뉴턴의 절대 시간, 절대공간


현대인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확립한 뉴턴은 시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인 시간은 그 어떤 외적 힘과 상관없이 그 본질에 따라 균일하게 흐른다. 이를 다른 말로 '지속'이라고 한다." 뉴턴이 현대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확립했지만 그는 연금술사였으며 현대의 과학자는 아니었다. 아래는 뉴턴의 그 유명한 저작 <프린키피아 2판 주석> 부분에 나온 언급이다. 읽어보면 우리가 아는 뉴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저자는 뉴턴은 기독교인이었고 연금술사였으며 물리학자가 아닌 자연철학자라고 언급한다. 나 역시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이 시대에는 여전히 '신'의 개입 없이 우주와 시간 그리고 공간을 펼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태양과 행성, 해성으로 이루어진 웅장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태양계는 다름 아니라 전지전능한 존재의 심려와 보살핌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신은 영원하고 전지전능하다. 신은 영겁에 영겁을 더해 지속하고 무한보다 더 무한한 곳까지 어디에도 존재한다."
<프린키피아 2판 주석>


드디어, 시공간이 합쳐진다


절대 시간이 무너지고 상대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또한 공간과 시간은 하나로 어우러지게 된다. 로렌츠 변환 이야기도 나오고 '에너지는 운동량의 시간 성분이다'라는 과학적 직관에 대한 언급도 있다. 플랑크 길이, 플랑크 시간, 상대성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소립자의 시간에 대한 설명도 쉽게 나와있다. 우리가 가장 잘못 알고 있는 엔트로피와 맥스웰의 악마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시킨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화살' 가설과 '허수 시간' 가설, 초끈이론까지 숨 가쁘게 달린다. 시간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인류가 시간에 대해 사유한 순서대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계속 쌓여간다. <시간론>을 읽었는데 읽기 전보다 더욱 모르는 것이 많아진 느낌이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너무 <시간>을 등한시 한 결과일 수도 있다.


어릴 적 제일 궁금했던 질문들 중에 하나는 '시간은 왜 눈에 보이지  않을까?'였다. 공간처럼 시간은 왜 볼 수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고등학교 물리선생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시간론>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가설만을 제시할 뿐이다. 호기심 가득 찬 질문들 중에 '시간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다. 저자는 시간 자체가 호모 사피엔스 종이 우주를 관측할 때 사용하는 개념틀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틀에 집착하며 실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잘못된 질문과 인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성이론에선 시간과 공간 성분이 '회전'으로 섞여버리기에 상대적으로 공간과 시간이 보일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이 부분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수식으로 계산해봐야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관측자 A에게는 시간 성분이지만 관측자 B에게는 공간 성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여정은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이 <시간>은 다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시공간에 머무는 우리들이 시공간을 벗어나서 그 시공간을 직시하지 않는 한 이러한 물음들은 끊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주와 천체와 시간과 공간에 대해 하나씩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 결국 한 걸음씩 나아가며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시간론>은 시간에 대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식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에게 추천한다. 다케우치 가오루의 <시간론>은 고등학교 수준의 물리 지식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책이다. 다만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시간>을 한번 정리하고 싶은 자, 이 책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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