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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th Point Feb 19. 2016

<만들어진 신> 무신론의 교과서

리처드 도킨스가 보여준 무신론의 세계는 그의 지적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중력파에 대한 발표가 있던 그날, <만들어진 신>을 다시 읽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쉽사리 넘겨지지 않던 페이지들. 3-4년의 시간은 과연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나를 끌어당길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펼쳤다. <만들어진 신>은 쉽게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또한,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이 <눈먼 시계공>이나 <지상 최대의 쇼>처럼 두꺼운 책이기에 완독 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책을 구매하기에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이러한 책들은 책장에 꽂아두면 많은 효과를 뿜어낸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이 책장에 3,4권 이상 꽂혀있다면 그 사람은 최소한 신이 존재한다는 진영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중력파 발견에 대한 발표가 있던 그 시기에 나는 책장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의 시기에 다시 음미하기 좋은 책이니까 말이다.


지적 행위의 결정판, <만들어진 신>

물론 이 책을 포함한 리처드 도킨스의 거의 모든 저작들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히 갈린다. 유신론 쪽의 사람들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저작을 깡그리 무시하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궁금하다. 리처드 도킨스의 모든 책을 다 읽고 반박하는 것일까? 아니면 신이 없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아무런 논거 없이 싫어하는 것일지 말이다. 나는 <만들어진 신>을 포함한 그의 저작을 지적 행위의 결정판이라고 부르고 싶다. 곁에 두고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는 리처드 도킨슨의 수많은 저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중고등학생에겐 <만들어진 신>이 버거울 수 있다

그들을 위해 쉽게 설명된 책, 그림이 가득한 책이 한 권 있다.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인데 이 책 역시 몇 번을 읽어봐도 항상 즐겁다. 현상에 대해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리처드 도킨스를 보고 있자면 부럽기까지 한다. 진화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인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을 읽고 나서 리처드 도킨스의 명작들인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만들어진 신> <지상 최대의 쇼> 등을 읽으면 된다.


리처드 도킨슨의 날카로운 지적

리처드 도킨슨은 이 책에서 자신은 분명한 무신론자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신을 믿음으로 인해 발생한 폐해등을 하나하나 가리킨다. 신을 믿는 사람 역시 부정하지 못할 역사들을 하나씩 나열한다. 종교가 사라진 사회모습이 종교가 존재하는 사회보다 오히려 희망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신이 죽은 사회가 더욱 인간이 어울려 살아갈만한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신이 사라져야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막연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함이 신이라는 존재 앞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만들어진 신>의 지적인 언급들

과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수수께끼에 기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할 일을 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과학의 역사가 우리에게 무언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무지에 '신'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행위가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의 비유적 또는 범신론적 신은 성경에 나오는, 그리고 사제와 이맘과 랍비가 말하는 신 즉, 인간사에 간섭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우리의 생각을 읽고 죄를 벌하고 기도에 답하는 신과 아득히 멀다. 둘을 일부러 혼동시키는 것은 지적인 반역 행위다.
종교 신앙의 요체, 그것의 위세와 주된 영광은 그것이 합리적인 정당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신이 무엇인가의 설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설명의 부재, 어깨를 으쓱하는 것, 영성과 의식으로 치장한 "난 몰라"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신의 공로로 돌린다면, 일반적으로 그 말의 의미는 그들이 단서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능력 밖의, 이해할 수 없는 요정과 같은 범주로 본다는 것이다. 그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을 요구하면, 그것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거나 자연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등의 모호하고 사이비 철학적인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런 대답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제퍼슨이 선배인 존 애덤스에게 쓴 편지에는 선견지명이 담겨 있었다. "예수가 처녀의 자궁에서 그의 아버지인 신에 의해 신비하게 잉태되었다는 이야기는 미네르바가 주피터의 뇌에서 나왔다는 우화와 같은 범주로 분류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자 왓슨(유전학 혁명을 일으킨 그 왓슨)은 이렇게 대꾸했다. "저는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저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당신의 인생은 참 황량하겠다.' 하지만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을 기대감에 차 있습니다."
아무튼 <도마서>에 실린 것 같은 엉성한 기적담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 가지 정전을 믿을 만한 이유도 그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모두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만큼이나 미심쩍은 전설들이다. 네 편의 정전에 공통되는 내용은 대부분 복음서 중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이나 그 전신인 "사라진 복음서"라는 공통의 원전에서 유래했다. 네 편의 복음서 저자들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음은 거의 확실하다. 그들이 쓴 내용들 중 많은 부분은 역사를 정직하게 기술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구약성서>를 재탕한 것이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삶이 <구약성서>의 예언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주장처럼 유신론만큼 보호받아야 될 사상은 무신론이다.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편견 없이 바라봐야 한다. 무신론은 과학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체계적인 설명을 진행 중인 반면, 유신론은 믿어야 보인다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면서 과학이 아직 설명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자신들의 해석체계를 가지고  설명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공격하곤 한다. 무신론이  잘못되었다면 유신론의 해석체계로 설명하면 되는데 '신'이라는 답만 덩그러니 던진다. 유신론이 정말 나쁜 것은 어쩌면 '몰이해를 당연시하고 그 안에서 안주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모든 것을 신으로 설명하려는 행위는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설명해내지 못하는 지금의 종교를 민낯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단지 진화의 산물이며,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역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모습을 아주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이라는 단어는 자연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기에 설명의 부재라는 조롱이 따라다닌다. 그렇다. 신이라는 설명은 전지전능이 아니라 부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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