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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th Point Apr 14. 2016

연극 <게임>이 보여준 단상

마이클 바틀렛의 최신작 <게임>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자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두산아트센터에서 진행된 연극 <게임> 프레스콜에 참석하고 왔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배우들의 호흡을 느꼈다. 마이클 바틀렛의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고 다시 보고 싶은 연극이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들의 일상과 너무나 닮아있었기에 극의 후반부부터는 더 이상 무대와 관객석을 분리하지 못하고 완전히 녹아서 동화되었다. 배우 전박찬과 하지은의 호흡과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연기는 <게임>을 더욱더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뛰어났던 연기와 이 연극이 준 강열한 인상은 계속 나에게 남아있을 것이다.


연극과 현실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다

자, 우리 앞에 하나의 연극이 놓여 있다. 이 연극은 집이 필요한 신혼부부가 무상으로 제공받은 '화려한'집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부모님 집에서 눈칫밥을 먹던 그들에게 들어온 제안,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대신 무료로 집을 머물게 해 준다는 것. 집이 없는 애슐리와 칼리에게 제공된 집은 멋진 인테리어와 가구들, 미니멀한 거실과 침실, 그리고 깔끔한 욕실을 갖춘 누구나 바라는 그러한 집이었기에 일말의 망설임은 하얀 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사생활의 노출만이 유일한 조건이 아니었다. 관람객들에게 노출과 더불어 마취총으로 사냥까지 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좁은 우리 속에 갇혀 지내는 동물을 가까운 거리에서 마취총을 쏘며 사냥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런 느낌. 어쩌면 이 연극은 우리 현실이 이미 어떤 소중한 가치를 포기함으로써 편리함을 얻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슐리와 칼리가 자신들이 살게 될 집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관찰자 VS 관찰대상

극 중에서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무자비하게 평가하고 쉽게 생각하며 이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다. 신혼부부는 관찰대상이 됨으로써 관찰자들로부터 인간의 가치를 빼앗겨버린다.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간격은 실제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섬뜩할 지경이다. 연극 내에서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미묘한 심리 간격은 이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극 밖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다. 극 초반에 터져나오던 웃음과 약간의 웅성거림은 극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찬 커피의 쓴 맛처럼 얼어붙었다. 이 연극은 어쩌면 3가지 시선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관찰자 VS 관찰대상 VS '방조자'처럼 느껴지는 관객으로 말이다. 또한, 여러 대의 카메라를 통해 관찰자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관찰대상을 은밀히 관음 하고 있다고 연출하고 있다.


75분의 러닝타임으로 기나긴 시간의 감정들을 보여준다

75분 정도의 러닝타임을 통해 7년 정도의 시간을 다뤘다. 2명이서 들어오게 된 집에는 이제 3명의 구성원이 어우러진다. 새로이 태어난 '리암'은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리암 역시 관찰대상이며 관찰자에게 사냥 대상임은 자명한 일. 이를 두고 관찰대상과 관리인 간에 논쟁들이 벌어지지만 결국은 모두 관찰대상의 범주로 속하는 것으로 결론 나게 된다. 리암에게는 그 집이 세상에 전부 이건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관찰당함'과 '사냥당함'을 자연스레 체득한다.



연극과 영화의 그 언저리에서

<게임>이라는 연극은 무대 위에서만 펼쳐지지 않는다.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는 영상도 함께 어우러진다. 즉 무대 위에서는 관찰대상이 관객에게 자신들의 몸짓을 전달하고 모니터를 통해서는 관찰자들이 관객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해준다. 연극과 영화의 그 언저리에서 이 <게임>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히려 타자를 절대적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 함께 어울러이지는 무대였다면 관찰대상과 관찰자의 피비린내 나는 대립이 쉽게 성립되지는 못했으리라.


너무나 멋진, 그래서 너무나 소중했던 연극 <게임>

연극 <게임>은 작년과 올해를 통틀어 본 연극, 뮤지컬, 오페라 중에서 가장 몰입되는 작품이었다. 마이클 바틀렛의 최신작인 <게임>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의식 중에 탐닉하는 관조증을 가지고 멋진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두려웠던 점은 멋진 상상의 나래가 아닌 이 자체가 실제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연극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연극에서 관찰대상과 가장 많이 동화될 수밖에 없던 관리인이 마지막에 무대에 올라온다. 그리고 관찰대상의 아들에게 묻는다. "리암, 넌 어떻게 할래? 거기 있을래? 나올래?" 리암 역시 부모와 함께 7년간 익숙했던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계속 미적대는 그에게 관리인이 물었던 것이다. 리암에게는 이 집이 세상의 전부였는데 이곳 말고 다른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야 하는 것이리라. 알 속에서만 살던 존재가 알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서야 하는 그런 모험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알을 깨는 그 과정과 비슷한 일을 리암은 해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의 이 장면은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견디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 힘듦이 아예 낯선 시작보다야 더욱 좋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결국 마이클 바틀렛은 관객에게 관리자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관찰당하고 사냥당하는 디스토피아가 좋은지 아니면 미지의 두려움으로 둘러싸인 모험이 좋은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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