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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th Point Sep 10. 2015

지나간 여름, 뿌이 퓌메

무더운 여름을 파이니스트 뿌이 퓌메로 견뎌내다




얼마 전이다. 그렇게 덥지 않은, 하지만 습도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던 8월이었다.

장마전선이 펼쳐져 있지만 그 위력은 고작 빗방울 몇 개만 흩날리는 나날들이다. 정말 미쳐버리는 날씨였다. 사람의 감정조절 능력이 이렇게 망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여러 차례 지나갈 때쯤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갈피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차가운 물이 씻기를 몇 번, 다시 비가 조금씩 내렸다. 가뭄이 심할 때 땅이 거북등처럼 쫙 갈라지는데 그 안에 물 몇 방을 쏟아 넣은 느낌의 비가 내린 후 다시 구름만 잔뜩 끼여있는 상황. 내린 비로 인해 나를 둘러싼 습기는 나를  질식사시킬 준비를 끝마쳤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이라는 책에서 설명된 '적의'가 도시의 수많은 가로등처럼 거실 속에 나열되어 있다.



강신주는 '적의'를 아주 심플하게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허망한 전투라고 적고 있다. 맞다. 지금의 날씨는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너의 노력들은 헛되다라고 비웃고 있다. 습도가 100퍼센트가 가까워진 저녁 어쩔 수 없이 와인을 꺼내 든다. 현재의 삶으로부터 도피인 것이다. 지고 만 것이다. 고작 습기 따위에 말이다. 물론 어설픈 비가 적군으로써 훌륭한 역할을 해준 것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지사.





당연히 화이트다. 내가 꺼내 든 비장의 카드는 당연히 화이트인 것이다. 이런 날씨에 레드를 홀짝이는 것, 그건 정말 레드와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니면 미쳤거나 말이다. 미친 가능성은 제외하고 정말 어떤 사물을 좋아하는 묘사를 이미 다른 책에서 너무나 잘 설명해 놓았다. 아쉽다. 나도 저러한 표현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3개월 전에 <밤의 인문학>이라는 책에서 보고야 말았다.


<밤의 인문학>이라는 책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포르쉐는 돈 많은 사람이 사는 게 아니야. 포르쉐를 좋아하는 사람이 산다고.'


이런 날씨에 레드를 마시는 사람은 정말 돈이 없어도 포르쉐를 사는 사람처럼, 돈이 없더라도 무조건 레드와인만 사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레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시원함과 향긋한 그 무엇이 필요했다.





파이니스트 뿌이 퓌메 2010
Finest Pouilly Fume 2010


와인 오픈 후 깊게 향을 맡는다. 파스칼 졸리베의 상세르 블랑이 스쳐 지나간다. 이 와인은 쇼비뇽 블랑 100퍼센트로 만들어졌는데 첫 향은 풋사과의 느낌이 올라오며 마지막은 과실 향이 훅하고 지나간다. 산도가 적당하면서 와인의 전반적인 밸런스는 좋다. 첫 목넘김은 역시나 기대했던 상쾌함이다. 습기가 가득한 거실에서 햇자두와 수박 그리고 블루베리와 함께 먹었다. 갑자기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이 정도의 와인이라면 차돌박이구이와 함께 마셔도 충분히 그 기름의 질감을 잡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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