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테크 기업 S (2/3)

by James

4. 협상 방법, 셋업

본격적인 협상은 숫자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첫 미팅에서 나는 밸류에이션도, 지분율도, 일정도 꺼내지 않았다. 그 질문들을 먼저 던지는 순간, 이 대화는 우리가 익숙하게 반복해 온 바이오테크 투자 미팅 중 하나가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첫 미팅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계속 남아 있었다. 일반적인 요구사항을, 어딘가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그 느낌 때문이었다. 마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논문이나 ChatGPT에서 가져온 문장을 외워 발표하는 학생처럼, 말은 맞는데 맥락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이 팀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이미 자기 영역으로 확정해 두고, 빠꿀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느냐였다.


사업 계획이나 성장 경로 대신 실패를 물었다.

“이다음 실험이 실패하면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나요?”
“이 타깃을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인가요?”

질문은 단순했지만 의도는 분명했다. 과학과 회사의 경계를 어디에 긋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선이 내부적으로 이미 합의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이어진 답변은 예상대로 정제돼 있었다. 골자는 실험 설계, 적응증 선택, 데이터 해석은 전적으로 창업팀의 영역이며, 그 판단을 투자자 승인 대상으로 올릴 생각은 없다는 점. 다만 프로그램 종료나 회사의 방향을 바꾸는 수준의 결정, 그리고 예산이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에는 투자자 승인을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내용 자체는 첫 미팅에서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장 안에 들어간 미묘한 뉘앙스와 예시들은 하나의 확신을 주었다. 설령 기존 투자자나 자문단이 방향을 잡아주고 창업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부적으로 동일한 스탠스가 이미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 정도의 선은 우리도 이미 준비하고 있던 요구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부 애널리스트와 사이언티스트들이 과학적 타당성과 임상 리스크를 충분히 검토한 상태였기 때문에, 과학과 임상에 대한 전권을 넘기는 데에도 큰 부담은 없었다. 그 전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제한적인 투자자 승인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금 역시 준비된 상태였고, 클로징 데드라인이 그들의 손에 있는 것도 실질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조건을 그대로 받아줄 이유는 없다.

감당할 수 있다는 것과 아무 대가 없이 넘겨준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건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조건 위에 우리의 계산을 분명히 올려놓기로 했다.

첫 번째는 정보였다. 과학과 임상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최대한 투명하게 공유해 달라고 했다. 임상과 주요 연구 진행에 대한 정기 리포트, 실험 결과에 대한 데이터 접근, 그리고 가설 변경이나 부정적 결과가 발생했을 때의 즉시 통지 의무. 통제권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정보 비대칭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실패했을 때의 룰이었다. 잘 될 때는 창업팀이 판단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대신 프로그램이 중단되거나 핵심 가설이 무너졌을 때, 잔여 자금을 어떻게 쓰고 어떤 선택지를 검토할지에 대한 합의를 요구했다. 실패를 막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 엉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다음 단계에 대한 옵션이었다. 지금의 구조를 받아들이는 대신, 후속 라운드에서의 선택지는 남겨두자고 했다. 무조건적인 권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정 범위 내에서의 우선 참여나 리드 유지에 대한 옵션. 지금은 통제를 요구하지 않지만, 이 판단이 맞았을 경우 다음 판에 다시 들어올 수 있는 자리는 확보하자는 계산이고 준비였다.


즉,

정보 비대칭 보정 (Information Rights 강화): 과학·임상 전권을 인정하는 대신, 정보는 최대한 투명하게 공유하는 구조를 요구했다.

실패 시 구조적 보호 (Downside Rule-setting) 프로젝트가 잘 굴러갈 때는 창업팀이 판단한다. 하지만 실패했을 때의 룰은 미리 정하자고 했다

후속 라운드 옵션 (Deferred Upside) 지금 구조를 받아들이는 대신, 다음 선택지는 남겨두자는 카운터였다.

이 카운터들은 싸움을 걸기 위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이 구조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협상이었다.


5. 협상 경과 (1차)

카운터를 던진 뒤 협상의 공기는 오히려 더 부드러워졌다. 우리가 제안한 정보 권리나 실패 시의 룰, 후속 라운드 옵션은 새로운 요구라기보다는, 그들이 처음에 그어 놓은 선을 연장한 조건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과학과 임상은 자신들이 책임지고 가져가겠다는 전제 아래, 그 판단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 갈 것인지에 대한 정리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미팅에서는 점점 “될 수 있느냐”보다는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문구를 다듬는 과정에서도 방어적인 반응은 거의 없었다. 이건 안 된다는 말보다는, 이 정도면 합리적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나왔다. 우리가 요구한 조건들은 서로의 역할을 명확히 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숫자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과장된 이야기도, 지나치게 보수적인 접근도 아니었다. 시장 가정, 필요 자금, 희석에 대한 감각 모두 현실적인 선에서 오갔다. 누구도 계산기를 숨기지 않았고, 숫자를 던진 뒤 방어막을 치지도 않았다. 다만, 초반에 느꼈던 그 미묘한 기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기존 투자자와 창업자가 새로운 투자자의 합류를 조심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는 태도. 하지만 한 배를 타게 된다면 우리 역시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시점에서는 이런 기존 투자자와 창업자의 성향이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한편으로는 계속 협상을 위한 작업을 이어갔다. 그중 하나가 이사회 구조였다. 예를 들어 5인 이사회 구성이라면, 창업자 2, 투자자 2, 독립 이사 1이 일반적이다. 상대측은 독립 이사 추천권을 창업팀이 보유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이 부분은 내부적으로 이미 수용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협상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관계가 단순히 돈을 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오랜 시간 함께 협업해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추천권이 아니라 자격 요건에 집중했다. 사람을 고를 수 없다면, 기준을 설계하자는 접근이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직접 선택할 수는 없더라도, 내가 원하는 성향의 후보군 안에서 결정되도록 만드는 것, 일종의 silent control이었다. 이 부분도 무리 없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이쯤 되자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아직 축배를 들 단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딜이 가능성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었다. “클로징까지 가려면 남은 건 이런 것들”이라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고, 일정도 가정이 아니라 실제 옵션으로 다뤄졌다. 샴페인을 따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냉장고에 한 병쯤 넣어두는 건 지나친 설레발이 아니라는 느낌. 그 정도의 낙관은, 이 시점의 협상 테이블 위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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