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테크 기업 S (3/3)

by James

6. 피봇

피봇은 갈등에서 오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조건이 정리되고, 서로 받아들이기로 한 상태에서 찾아왔다. 핵심 쟁점이던 과학과 임상의 전권, 제한적인 투자자 승인 구조, 정보 권리와 실패 시의 룰, 이상적인 이사회멤버, 후속 라운드 옵션까지. 문구는 더 다듬어야 했지만, 방향에 대한 합의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보통 협상은 속도의 문제로 넘어간다. 언제 서류를 돌릴지, 어떤 순서로 내부 결재를 밟을지, 클로징을 어느 날짜로 잡을지. 바로 그 시점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동시에 겹치기 시작했다.


먼저 시장이었다. 거기에 규제 환경의 변화가 겹쳤다. FDA가 특정 진단 기술과 데이터 활용 방식에 대해 보다 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 있다는 신호가 업계 전반에 돌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가이드라인 변경은 아니었지만, 코멘트 하나, 표현 하나가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임상이나 주요 설계 자체를 다시 짜야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타임라인과 추가 데이터 요구 가능성에 대한 계산은 다시 해야 했다. 이 역시 딜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타는 아니었지만, 속도를 늦추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해당 바이오 섹터 전반의 밸류에이션이 빠르게 재조정되기 시작했고, 이 회사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 회사가 놓여 있는 시장의 온도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이 밸류가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섹터에서 신규 리스크를 더 가져가는 게 맞느냐”라는 질문이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동시에 회사 안팎에서도 작은 이슈들이 겹쳤다. 핵심 실험을 담당하던 외부 CRO의 일정이 밀렸고, 내부적으로는 다음 실험 단계에 투입될 리소스를 두고 우선순위 조정이 필요해졌다. 창업팀의 판단이나 역량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이 자금을 집행하는 순간부터, 이 회사는 어떤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몇 주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이 변화들은 하나만 놓고 보면 모두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장, 규제 기조, 실행 환경이 동시에 흔들리자, 이 딜은 더 이상 ‘조건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논의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이 딜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 타이밍에 이 딜을 해야 하는가. 어떤 미팅에서 상대방 리서처중 한 명이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그 말은 조건을 더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표현이 아니었다. 데이터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아마도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함께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그 순간부터 이 협상은 앞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같은 결론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었다.


7. 협상 결과

환경이 바뀐 이후에도 협상은 갑자기 멈추지 않았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이미 합의된 조건들이 다시 뒤집히지는 않았다. 다만 내부 논의의 결은 분명히 달라졌다. 더 이상 “어떻게 클로징까지 갈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구조를 유지한 채 클로징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확인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우리 쪽에서는 내부적으로 시나리오를 다시 그렸다. 동일한 조건으로 지금 집행할 경우와, 시간을 두고 다시 접근할 경우. 자금의 기회비용, 내부 리소스 배분, 그리고 이 딜이 차지하는 포트폴리오 상의 무게까지 다시 계산했다. 숫자보다 더 많이 오간 건 질문이었다. 이 환경이 단기간에 정상화될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기준선이 되는 변화인가.


상대 역시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조건을 완화하겠다는 제안도, 일정을 무리하게 당기겠다는 압박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서로가 현재의 판단을 어디까지 공유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이 회사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는 문장이 몇 차례 오갔고, 그 말에는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 없었다.


결국 논의는 자연스럽게 한 결론으로 수렴됐다. 지금은 아니다.

딜의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도, 팀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환경에서는, 이 딜을 밀어붙이는 것이 우리가 설계해 온 투자 방식과 맞지 않았다. 조건을 더 유리하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투자를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문은 닫지 않았다. 정보 공유는 이어가기로 했고, 특정 마일스톤 이후 다시 논의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겼다. 형식적인 “다음에 보자”가 아니라,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조건을 서로 인지한 상태였다. 회의실을 나설 때 분위기는 차분했다. 실망도 없었고, 갈등도 없었다. 오히려 서로가 같은 언어로 판단하고 있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이 협상은 결과적으로 투자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협상 자체는 끝까지 성실하게 진행되었다. 협상은 끝났지만, 관계는 유지되었고, 선택지는 남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딜은 충분히 의미 있는 기록이 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협상을 잘했고 못했고의 이야기로 정리하기 어렵다. 조건은 정리되었고, 논리는 맞았으며, 서로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된 상태였다. 누군가 더 설득했거나, 누군가 양보를 덜 했기 때문에 끝난 딜도 아니었다. 이 딜이 멈춘 이유는, 협상 테이블 위가 아니라 그 바깥의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온도가 바뀌었고, 규제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으며, 실행 속도를 전제로 했던 여러 가정들이 동시에 흔들렸다. 어느 하나만 놓고 보면 감당 가능한 변화였지만, 그것들이 한꺼번에 겹치자 기존의 로직은 다시 판단되어야 했다.


물론 더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해 시간을 끌 수도 있었고, 더 보수적인 구조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투자는, 우리가 처음 이 딜을 검토하며 설정했던 기준과는 어긋나 있었다. 결국 이 딜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끝났다. 아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분명한 패배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시점, 그 환경에서 해야 할 일은 투자보다 기다림이라고 판단했다.


협상과 별개로, 투자는 결국 계산 가능한 판단이어야 한다. 협상은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처럼 보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때로는 협상의 끝에 반드시 투자가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협상의 끝이 곧 투자인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투자가 성사될 하나의 중요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협상에 임한다. 그러나 동시에 투자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역시 언제나 열려 있다.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환경이 그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한 발 물러서는 선택이 필요하다. 이번 건은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 선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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