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협상
모든 투자가 성공적일 수는 없다. 협상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말이다. 수천억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가 개인 투자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소위말해 '물리기도 한다'. 그리고 수많은 협상을 경험한 사람도 생각보다 단순한 변수 앞에서 딜을 놓치기도 한다.
나는 회사 내부 미팅은 오전에, 외부 미팅은 주로 오후에 잡는 편이다. 의도적인 전략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굳어졌다. 우리 회사의 Director나 Vice President 이상이 참여하는 주간 전략회의가 대부분 아침 8시 첫 미팅이고, 사장이나 본부장급과의 미팅도 대개 오전에 잡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과 전략 논의가 아침에 몰려 있다 보니 가끔은 의도치 않게 블랙기업에서나 볼 법한 태스크를 던질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내일 아침 8시 미팅 전에 필요한 자료입니다” 같은 지시 말이다. 반성하자, James.
몇 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나는 미국 회사가 굉장히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회사에 미끄럼틀이 있고,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언젠가 사진으로 봤던 구글 사무실 같은 모습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처음 회사를 다니며 들었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회식만 없는 한국 증권사인데?" 같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명확한 지시와 보고 체계, 프로젝트 중심의 업무 방식. 생각보다 훨씬 전통적인 조직이다.
가볍게 다룰만한 사소하고 재미있는 차이라면 사무실에 슬리퍼가 없다는 것 정도다. 한국에서 회사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컴퓨터 전원을 켜고, 구두를 책상아래 한 구석에 가지런히 벗어두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 것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드라마 미생에서도 슬리퍼는 직장인의 전투화 같은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뉴욕에서 내 출근은 조금 다르다. 집을 나설 때는 운동화를 신고 나간다. 정장에 운동화라니 예전의 나였다면 기겁했겠지만 뉴욕이나 런던은 길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그리고 나는 지하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 시간 안쪽 거리라면 가능하면 걸어 다니려고 한다. 노숙자도 많고 냄새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수백만 원을 쓰고 여행 오는 도시 아닌가. 기쁜 마음으로 걷기로 한다.
정장에 운동화라고 하면 이탈리아 패션 잡지에서 보던 것처럼 트래디셔널함에 살짝 킥을 주는 스타일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종류가 아니다. 캔버스화나 디자인이 예쁜 신발이 아니라 정말 운동화다. 고어텍스, 메시 소재가 들어가고 저녁에 한강변을 걸을 때 신을 법한 그런 신발. 늘 들르는 커피집에서 미리 주문해 둔 커피를 픽업한다. 가십걸에서 나올 법한 캐러멜 프라푸치노에 샷 추가, 시럽은 반펌프, 소이 밀크로 변경, 휘핑은 조금 같은 주문은 아니다. 한국인은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한국 증권사에서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컴퓨터에 로그인하고, 방 한편에 두었던 구두로 갈아 신는다. 단, 슬리퍼가 아닌 구두로.
그래도 슬리퍼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과, 한국에서 미국으로 와 커리어를 바꾸는 독자를 위해 하나 추천을 하자면 몽크 스트랩(Monk strap) 구두다. 대부분의 포멀 한 사무실 복장에도 잘 어울리고, 끈 대신 버클이 있는 것 자체가 클래식한 드레스 코드 안에서는 살짝 캐주얼한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에 디자인에 따라서는 세미 정장에도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스트랩을 넉넉하게 풀어두면 슬리퍼처럼 편하게 신을 수도 있다. 밤새 차가워진 가죽이 얇은 양말을 통해 느껴진다. 운동화처럼 발을 폭신하게 감싸주는 느낌보다는 단단한, 그리고 헐거운 슬리퍼 느낌이다.
이제 사무실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일정을 확인한다.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 미팅 하나가 잡혀 있다. 바이오테크 회사와의 미팅이다. 바이오테크 회사와의 미팅은 이상하게 늘 그 시간대에 잡힌다. 아침에는 실험실이 바쁘고, 점심 이후에는 데이터 리뷰가 길어진다. 결국 투자자를 만나는 시간은 하루의 끝자락으로 밀린다.
회의실은 깔끔했고 말수가 적은 분위기였다. 바이오테크 미팅에서 흔히 느껴지는,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공기였다. 이 분야의 대화는 늘 비슷하게 시작하고 비슷하게 딜이 깨진다. 임상 실패, 규제 리스크, 자금 소진. 이 에피소드 역시 그런 이유로 끝난 하나의 평범한 협상이다.
이번에는 “해볼 만하다”를 넘고 싶었다
이 회사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기전은 단순했고 타깃은 명확했다. 설명은 길지 않았고 변명도 없었다. 대표의 이력과 연구진의 트랙레코드를 보면 어느 하나 허술한 부분이 없었다. 해당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연구소에서 커리어를 쌓은 사람들이 한 명의 교수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고, 그 구성 자체가 이미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이라면 조금 과장이겠지만, 꽤 성공적인 투자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과장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바이오테크나 딥테크 투자는 늘 전문성을 아는 사람들의 언어로 시작된다. 그래서 비전공자가 VC나 투자 직군으로 들어갈 때 이 분야는 늘 시험대처럼 등장한다. 문제는 이런 팀을 마주하면 판단이 쉽게 흐려진다는 점이다. 발견하기도 힘들다는 췌장암을 조기 진단한다는 키트(IVD), 앱 하나로 우울증을, 경도인지장애(MCI)를 스크리닝 한다는 디지털 바이오마커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투자자가 아니라 관객이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밀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스치고, 바로 그 지점이 가장 위험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능성 있어 보인다”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내 목표는 단순했다. 이 회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분위기나 기대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 위에서 확인하는 것. 바이오테크 투자에서 협상은 종종 판단을 미뤄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조금 더 지켜보자”, “데이터가 나오면 다시 이야기하자”, “다음 마일스톤에서 결정하자”. 그 말들은 모두 지금은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조건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조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누군가 “그럼 구조를 한 번 정리해 볼까요”라고 말한 뒤였다. 늘 그렇듯, 그 문장은 협상의 시작이 아니라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창업자는 미리 준비해 온 문서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노트를 덮고 담담하게 말했다. “과학 하고 임상은, 저희가 가져가겠습니다.” 말투는 단정했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설명도 길지 않았다. “실험 설계, 적응증 선택, 데이터 해석까지요. 그건 투자자 승인 대상으로 올리지 않겠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는 의자에 등을 붙였고, 누군가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곧바로 다음 문장을 덧붙였다. “다만, 프로그램 종료나 회사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수준의 결정, 그리고 예산이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엔 투자자 승인을 받겠습니다.”
일반적인 요청이었다. 우리도 감안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어디까지가 과학이고 어디부터가 회사의 의사결정인지 구분하려는 시도 역시 충분히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다만 방식이 조금 달랐다. 내용 자체는 상식적인데, 협상의 흐름은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이사회 이야기는 그다음에 나왔다.
“투자자 측에서 한 명 정도 추가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독립 이사 한 분. 추천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역시 상식적인 선에서의 요청이었다. 노골적인 캐스팅보트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관계에서 관계의 무게 중심이 어디로 기울어 있는지는 분명했다.
마지막 조건은 거의 덤처럼 나왔다.
“그리고 일정은 이렇습니다.” 이번에는 날짜가 나왔다. 구체적이었다. “이 날짜까지 클로징이 안 되면 이번 라운드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위협도 아니었고 압박도 아니었다.
즉, 그들이 제시한 조건은 이랬다.
과학·임상 전권: 실험 설계, 적응증 선택, 데이터 해석은 창업팀 전권으로 하고 승인 대상에서 제외.
제한적 투자자 승인권: 프로그램 종료, 회사의 방향을 바꾸는 수준의 결정
이사회 구조: 투자자 측 이사 1명 추천 가능, 독립 이사 추천권은 창업팀이 보유.
클로징 데드라인: 정해진 날짜까지 클로징이 이뤄지지 않으면 라운드는 자동 종료
이건 더 따질 수 있는 딜이 아니었다.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 미팅에서 나온 내용들을 나중에 글로 정리해서 읽어보거나, 제안을 서면으로 받았다면 충분히 상식적인 조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는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남았다. 마치, 누군가가 이 조건들을 정확히 이 선까지 전달해야 한다는 임무를 받고 온 것처럼. 이 딜은 설득으로 만들어지는 종류의 협상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