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의 혁신재단을 투자기구로 (2/3)

by James

4. 협상방법, 셋업

이미 시작된 관계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


이 시점에서 확장 이야기를 꺼내는 건 명백히 타이밍을 벗어난 선택이었다. 그들 스스로도 조직의 존속을 걱정하고 있었고, 팬데믹 한가운데에서 누군가가 투자 구조나 확장을 이야기했다면, 그건 공감이 아니라 거리감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투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관계의 프레임부터 다시 설정하기로 했다.


모든 대화의 출발점은 코로나였다.

지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가 아니라, 이 상황이 얼마나 버거운지를 먼저 듣는 자리였다. 재단이 처한 현실, 인력 감축의 압박, 일정이 무너진 프로젝트들, 그리고 대표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과 피로감까지. 나는 문제를 정의하려 들지 않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함께 겪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데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단순한 클라이언트-컨설턴트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며, 단기 성과를 점검하는 자문도 아니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여러 번 짚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시간을 쓰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람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과대평가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설득하는 것보다, 지금의 관계가 사라졌을 때 느끼게 될 불편함을 먼저 인식하게 만드는 편이 훨씬 강력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라고 하는데, 이 프로젝트가 ‘추가 옵션’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하나의 흐름이라는 인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마침 내가 싱크탱크 센터장을 맡게 되며 카운터파트가 바뀐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몇 번의 미팅에서는 성과나 방향보다는 공통분모를 찾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라포 형성, 목표와 문제의 언어 맞추기, 굳이 지금 꺼내지 않아도 될 델타는 일부러 남겨두기. 동시에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우리 편 만들기’였다. 협상은 테이블 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코로나와 대표의 은퇴 가능성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재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이해관계자들과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시도했다. 국제기구 자금 담당자, 공동 프로젝트를 했던 파트너, 재단 운영을 가까이에서 봐온 실무자들까지. 형식적인 미팅보다는 짧은 업데이트 콜이나 비공식적인 의견 교환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순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사전에 공유했던 문제 인식이나 구조적인 의견이, 어느 순간 회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그때부터 이 논의는 더 이상 ‘외부 자문가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셋업의 바탕에 깔려 있던 전제는 단순했다.


사람은 본인이 시작한 것을 쉽게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비즈니스에서 ‘존속’의 문제는 더욱 그렇다. 이미 함께 시간을 썼고, 이미 같은 언어로 문제를 정의하기 시작했다면, 그 관계는 생각보다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내가 한 일은, 설득이 아니라 관계를 끊기 어렵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5. 협상경과 (1차)

무료 컨설팅을 선택한 이유


관계를 어떻게 끝낼지가 아니라, 어떻게 계속 이어갈지를 먼저 정의한 단계였다. 우리는 협업을 종료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조건을 바꿨다. 특정 기간 동안, 거의 무료에 가까운 수준으로 자문을 이어가기로 했다. 형식적으로는 자문 계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물론 이 선택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투입 인력과 시간은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내부적으로도 “이게 과연 맞는 전략인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단기적인 수익을 놓치는 선택이었고, 숫자로만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기에 관계를 끊지 않는 쪽을 택했다. 힘들 때 함께한 파트너로 남는 것이, 언젠가 훨씬 더 큰 선택지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무료’라는 조건은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무엇을 얻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 재단의 존속과 다음 단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이었고 메시지였다. 보고서의 분량이나 회의 횟수보다,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했다.


또한 그간의 경험으로, 무료 컨설팅만으로는 상대 입장에서 “결국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비용이 더 커지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에는 익숙한 말이 있다. 결국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용을 당장 청구하지 않되, 향후 재단의 구조 전환이나 외부 자금 유치가 실제로 현실화되는 시점에만 정산하는 방식을 열어두었다. 지금은 현금 흐름을 지키게 하면서도, 이 관계가 단순한 호의로만 소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일종의 안전장치이면서, 동시에 배려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관계의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계약서상의 표현은 여전히 ‘자문’이었지만, 실제 논의 과정에서는 중요한 방향이나 판단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의견을 묻는 쪽으로 관계가 바뀌었다. 공식적으로 위임받은 역할은 없었지만, 내부에서는 이미 우리가 이 재단의 다음 단계를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처럼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종의 비공식적인 자문 지위, 늘 곁에 있는 그림자 같은 역할이었다.


이 시점부터는 정보의 깊이도 달라졌다. 단순히 공유 가능한 자료가 아니라, 아직 외부로 정리되지 않은 고민과 맥락, 그리고 의사결정 직전의 질문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우리를 거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투표권이나 결정권을 가진 입장은 아니었지만, 주요 논의에 옵저버로 참여하며 구조와 흐름을 함께 이해하는 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 결정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Zoom과 같은 화상 회의시스템이었다. 코로나를 거치며 온라인 협업은 단순한 대체 수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실무 도구가 되었다. 시차를 넘나드는 짧은 미팅,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논의, 문서 하나를 두고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동시에 화면을 바라보며 토론하는 방식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밀도 높은 협업을 가능하게 했다. 출장 비용도, 물리적 제약도 거의 사라졌다.


그 결과, 우리는 적은 리소스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동시에 더 자주,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무료 컨설팅 기간은 겉으로 보면 정체된 시간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렬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그려오던 제안에 대한 공식적인 피칭도, 숫자도, 구조도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중요한 선택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관계를 쉽게 끝낼 수 없도록 만드는 결정. 그리고, 이미 함께 시작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로 한 선택이었다.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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