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재단을 둘러싼 환경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코로나 상황은 어느 정도 안정 국면에 들어섰고, 중단됐던 프로젝트들도 제한적이나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한숨 돌리게에는 이르지만 가장 급한 불은 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혁신재단을 이끌던 대표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은퇴를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준비되어 있던 이야기 역시 아니었다. 그는 오랜 시간 지역 사회의 혁신 문화를 위해 힘써온 사람이었고, 이 재단은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그의 커리어이자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플랫폼이었다. 특히 팬데믹이라는 가장 힘든 시기를 팀과 함께 버텨낸 뒤에야 내린 고민이라는 점에서, 그 결정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중요했던 건, 이 이야기가 공식적인 이사회나 외부 이해관계자보다 먼저 우리에게 공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년간 무료에 가까운 조건으로 관계를 이어오고, 구조와 고민을 함께 나누며 쌓아온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물론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 상황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대표의 은퇴는 불확실성을 다시 키우는 변수였고, 자칫하면 그동안 쌓아온 발전과 전략적 협업을 위한 초석이 되는 모든 논의 자체가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질문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현재 이 재단은 대표 개인의 의지와 헌신 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구조이다, 가장 힘든 시기는 지났다고 하지만 이제 막 힐링이 시작된 이 집단을 어떻게 단시간에 대표의 부재 그 이후를 이어갈 수 있는 형태로 진화시킬 수 있는가.
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어 한다고 믿는다. 특히 가장 어려운 시기에 곁에 남아 있던 상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굳이 심리학에서의 상호성의 원칙(Reciprocity)을 생각하지 않더라고 우리가 유년기의 놀이터, 학교, 사회에서까지 나에게 잘해준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학습되어 왔다. 나는 이 원칙을 정면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선택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제안을 했다.
정답을 던지는 대신, 질문의 프레임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A. 엑싯 (Exit) 중심 지원
B. 차기 단계 설계 및 투자기구 전환
실제로는 수많은 액션 플랜과 숫자, 이해관계자 설계가 담긴 두세 권 분량의 전략이었지만, 극단적으로 줄이면 이 두 가지 선택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재단 이사장의 입장에서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질문을 다른 언어로 던진 것이었다. 그의 은퇴라는 결심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평생을 바쳐 일군 이 혁신의 이코시스템에 어떤 레거시를 남길 것인가 즉, 어떻게 ‘끝낼 것인가’ 혹은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도 이후 단계에서도 내가 할 일은 동일했다, 방식과 접근법은 다르겠지만 A와 B옵션 모두 투자기구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옵션 A와 B를 제시받았을 때 전혀 다른 Yes나 No로 답하지 않는다. 이미 제시된 두 선택지 안에서 고민할 뿐, 질문 자체를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진짜 영향력은 답을 설득하는 데 있지 않고, 처음 어떤 옵션이 테이블에 올라오느냐에 있다. 대표는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십수 년에 걸쳐 만들어온 플랫폼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컸다. 그렇기에 이 선택은 단순한 사업적 판단이 아니라,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순간부터 논의의 성격은 분명히 달라졌다. 우리는 아직 투자자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외부 자문가가도 아니었고 이미 한 팀으로서 이 재단의 다음 문장을 함께 써 내려갈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래서 사람은 왜, 이미 시작하면 쉽게 멈추지 못할까.
나는 여전히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은 결국 돌아온다고 믿는다. 다만 이번 에피소드의 결과는, 흔히 말하는 협상의 기술이나 테크닉이 만들어낸 성과라기보다는 시간과 관계, 그리고 구조가 함께 만들어낸 귀결에 가까웠다. 한 지역 커뮤니티를 위해 오랫동안 묵묵히 일해온 한 사람의 선의가 있었고, 그 선의가 사라지지 않도록 수익과 무관하게 우리의 시간과 전문성을 거의 무료에 가깝게 쓰도록 허락한 회사의 선택이 있었다. 이 두 가지가 겹치지 않았다면, 어떤 전략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순간은, 은퇴라는 인생의 큰 결정을 앞두고 그 사실을 우리에게 먼저 공유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조건을 제시하기 전에 신뢰를 건네는 행동이었고,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관계가 먼저 선택되었다는 신호였다. 그 신뢰가 있었기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은퇴라는 이벤트는 촉매였을 뿐, 본질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무한정 무료 자문을 이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선택의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함께 시작한 관계, 이미 시간을 써온 프로젝트, 이미 서로의 의도와 우선순위를 이해하고 있는 상태라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미 시작된” 상황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심리학의 이론을 빌리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와 한 발 들여놓기(Foot-in-the-Door)가 작동한다. 처음 무료 컨설팅의 연장은 새로운 요구나 추가 부담이 아니라, 이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계속 이어가는 선택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반복되면서, 관계는 점점 되돌리기 어려운 방향으로 깊어졌다.
그 결과, 무료 컨설팅으로 시작한 관계는 운영 구조를 함께 재정립하는 단계로, 심사 기준과 프로세스를 포스트 코로나 환경에 맞게 다시 설계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단발성 지원과 이벤트 중심이던 혁신재단은, 점차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가진 투자 플랫폼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어느 날 갑자기 방향을 튼 결정이 아니었다. 이미 시작된 이야기의,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다음 문장이었다.
물론 우리 이야기 속 그 대표는, 전 동료의 말에 따르면 일선에서 물러난 뒤 그림 같은 맨션과 자쿠지가 딸린 하얀 이층 요트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짊어졌던 책임은 육지에 두고, 이제는 파도와 만조 일정만 조율하는 삶이 된 것이다.
나는 아직 바닷물 위에서 따뜻한 자쿠지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람은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를, 생각보다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