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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1 시간의 틈새에 떨어진 씨앗

제1장 세상과의 만남

by 제임스


불청객처럼 찾아온 탄생


1962년 초겨울,

화폐개혁과 증권파동

대한민국 금융사의 대변혁 시기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의 씨앗으로 태어났다.


인간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탄생만은 오롯이 신의 영역이다.

어떤 부모를 만날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날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며 선택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인간 삶의 출발선은

매우 불공평한 것이다.



나는 부자 부모를 원하지도 않았고,

권력자의 부모도 더욱더 아니었다.

단지 평온한 가족의 일상이

지속되는 부모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부모는 매일같이 싸웠다.

그걸 보며 자란 나는 거의 우울증에 걸린 아이처럼 늘 시무룩해 있었으며

어린아이 마음엔 알지 못할 증오심이

싹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어머니의 한숨 사이에서 불청객처럼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아버지가 마신 소주병들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나를 잠재운 자장가였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화장대 앞에서

눈물로 화장을 지웠다.

그녀의 눈물 자국이 소주병에 고여 간직한 채,

나는 이 세상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하는 법을 배웠다.



싸움의 파편을 주워 담는 아이



우리 집 거실은 전쟁터였다.

금요일 밤이면 틀림없이 시작되는 부모의 싸움.

아버지가 던진 술잔이 벽지를 적시면,

어머니는 술병의 파편 조각으로 인해 발에 피가 흘렀다.

나는 식탁 아래 웅크린 채 그들의 발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검은 양말에서 풍기는 소주 냄새,

어머니의 푸른 실크 드레스에 묻은 피자국.

싸움이 끝나고 밤이 깊어 갈수록 방바닥에 널브러진 증오의 파편들을 주워 담는 것이

내 일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생일날,

친구들이 모두 집에 간 뒤 교실에 남아 창가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깨달았다.

창틀에 박힌 유리 조각에 비친 내 얼굴이 부모님의 분노를 닮아가고 있음을.


그날부터 나는 거울을 보는 대신 창문에 얼굴을 비추며 살았다. 깨진 유리에 비친 조각난

내 모습이, 차라리 진짜 나 같아서.



증오의 뿌리에서 피어난 의문



중학교 시절도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별의별 이유로 싸우다가 나중엔 이유조차 없이 싸우는 것 같았다.

그 시절엔 이혼이 손가락질받는 시기였다기보단 자식들 때문에 어머니는 이혼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결국엔 동생들까지 다 시집보낸 후에는 이혼을 선택하셨다.

이미 그때는 엄마의 청춘은 저만치 멀리 가버린 후였다.


누구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호의호식하면서 잘 사는데

나는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회의감과 패배 의식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한참 사춘기를 즐기는 친구들은 여자 친구를 만들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염세주의 철학자가 되어버린 듯했다.


"왜 하필 나인가?" “운명이란 무엇일까?”


교단에서 국어 선생님이 김춘수 시인의 꽃을 설명할 때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도,

이 질문만이 입안에서 쓴 약처럼 녹았다.

한편으론 ‘나는 나중에 결코 저렇게는 살지 않을 거야’ 다짐을 골백번도 더했다.



상처가 아물어 가는 날




서른한 살,

첫 아이를 낳는 순간 비로소 이해했다.

분만실 천장의 형광등이 1962년 우리 집 전구와 똑같이 노랗게 깜빡이던 것을.

내가 토해낸 생명의 첫 외마디 울음 속에서,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지 못했던 말들이 들려왔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용서하라."


신생아를 품에 안는 순간,

증오로 얼어붙었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눈 녹듯 흘러내렸다.


그 후 5년 뒤에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발견한 것은 그녀의 빛바랜 수첩이었다.

1969년 3월 2일 자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아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이 아이가 평생 우리 싸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까 봐 두렵다."


그 옆에는 내 초등학교 시절의 입학사진이 오래된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눈물에 번진 글씨로 "용서해 다오"라고 쓰여 있었다.



태어남 자체가 용서의 시작



나는 지금 어머니의 손자들이 낳을 증손주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들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운명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것이다.

유전되는 것은 상처만이 아님을 난 안다.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어릴 적 부모님의 싸움 소리와 겹쳐진다.

하지만 이제 그 소리는 다르게 들린다.

사랑의 또 다른 언어로.


나는 유리병에 담아두었던 어머니의 눈물을

창가에 내려놓는다.

햇살에 반짝이는 그 방울들이 증오의 씨앗 대신,

이제 막 등장할 손주의 머리카락에 이슬이 되어 맺힌다.


태어남이 불공평한 출발이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조리한 시작을 감싸 안은

어머니의 체온이,

아버지가 내 머리칼을 쓰다듬던 거친 손길이, 이제야 내게 사랑으로 다가온다.


모든 상처의 뿌리 끝에서 피어나는 작은 사랑의 싹.

그것이 바로 태어나서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생명의 속삭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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