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그림이 아니라,
마치 도시의 한 조각을 잘라낸 듯하다.
줄리안 오피(1958~ )의 ‘걸어 다니는 사람(Walking in the City)’
연작은 캔버스를 걷는다.
정지된 장면 속에서 인물들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단순한 선과 평면적인 색채, 얼굴 없는 사람들.
그러나 그 속에는 묘하게 익숙한 리듬이 숨어 있다.
우리가 매일 도시에서 마주치는 발걸음,
그 무심한 속도와 방향의 축소판이다.
오피의 인물들은 매우 단순하다.
눈도, 코도, 입도 없다.
개성은 지워지고, 인간은 하나의 기호로 바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단순함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나'를 본다.
출근길의 나, 버스를 향해 뛰는 나,
음악을 들으며 걷는 나.
오피는 구체적인 묘사를 지우고도 삶의 실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문득 나도 그 속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어딘가를 향해,
그러나 사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걷고 있는 수많은 하루의 나.
오피의 '걸어 다니는 사람'은 단지 이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멈추지 않음의 상징이다.
현대인의 생은 곧 움직임이다.
정지하면 불안하고,
속도를 잃으면 뒤처지는 듯한 시대.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인 셈이다.
줄리안 오피는 도시의 군중에서 시를 읽는다.
개성과 감정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엔 삶의 궤적이 있고,
감춰진 사연이 있다.
그는 군중을 흉내 내지 않고 군중을 통과한다.
익명성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을 오피는 선으로, 색으로, 걷는 동작으로 말한다.
나는 그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왜, 어디로 걷고 있는가.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걷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걸음 속에서 우리는 진짜 나를 잃지는 않았을까.
오피는 묻지 않는다.
다만, 그 걷는 사람들을 조용히 배치하고,
관람자 스스로 답하게 한다.
그것이 그의 그림이 말없이도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무표정하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거기에 담긴 수천 개의 일상,
무수한 관계,
감정의 파편들이 조용히 흐른다.
그 선들은,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실루엣이자 초상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걷는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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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2악장
https://youtu.be/RZ2rwyZYDZA?si=mzsuknkev243PXa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