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미술관의 하얀 벽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종종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처음 만난 사람과
어색한 침묵을 나누는 듯한 어색함이기도 하고,
동시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조급함이기도 하다.
그림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서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린 시절 나는 그림을 보는 일이 가장 쉬운 취미활동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노를 치려면 손가락이 아파야 하고,
축구를 하려면 숨이 차야 하지만,
그림은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달은 것은,
진정한 '감상'이란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정신 활동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그림에도 고유한 문법과 어휘가 있었고,
그것을 익히는 데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림을 그리는 아내 덕분에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갔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학예사 공부를 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더 우연하게도 지방의 한 공립미술관 관장으로 근무를 하였다.
알면 알수록 미술은 어렵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림 속엔 심오한 철학도 덤으로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그러한 철학적 바탕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심리학자 마이클 파슨스가 제시한 감상의 발달 5단계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미적 경험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하는지 알 수 있다.
유아기의 '좋다/싫다'는 본능적 반응에서 시작해,
사실성에 매료되는 단계, 감정의 표현력을 중시하는 단계를 거쳐,
마침내 역사적 맥락과 개인적 해석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감상에 이르기까지.
이 여정은 단순한 연령의 증가가 아니라,
경험의 축적과 사유의 깊이에 따라 결정된다.
나는 종종 내 감상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초등학교 시절, 사진처럼 정교한 인물화 앞에서 "와, 진짜 같다!"며 감탄했던 순간들.
그때의 나에게 그림의 가치는 현실 재현의 정확성에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고흐의 격정적인 붓질에서 광기와 천재성을 읽으려 애썼고,
고등학생 때는 피카소의 파편화된 얼굴에서 현대인의 소외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각 단계마다 나는 내가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이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발달 과정이 미술사의 흐름과 닮아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미술이 사실적 재현에서 감정의 표현,
인상주의를 거쳐 추상과 개념미술로 발전해 온 것처럼,
개인의 감상 능력도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마치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적 원리처럼,
우리는 각자의 성장 과정에서 인류 미술사를 압축적으로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반드시 더 나은 감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빨간 풍선 그림을 보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 순간의 감동이,
미술사학자가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을 분석하며
느끼는 지적 쾌감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은 아니다.
각 단계는 고유한 아름다움과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성숙한 감상자란 모든 단계를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최근 들어 나는 '모르는 것을 아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그림 앞에서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면,
이제는 때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작품은 나와 대화를 거부하고,
어떤 작품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신을 드러낸다.
그림 감상이란 결국 작품과 나 사이의 만남이며,
모든 만남이 극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 앞에 서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정말 그림일까,
아니면 그림을 통해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일까.
아마도 진정한 감상이란
이 둘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일 거다.
그림이 나를 바라보고,
나도 그림을 바라보는 그 신비로운 상호응시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고 또 새롭게 창조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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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KG_6BqnhpI?si=cztKbR9bF4hJXy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