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뻤다

추억 속으로

by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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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면 생각난다.

그리움도 슬픔도 아닌,

오래된 빗물처럼 스며드는 무언가.



78년 당시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1978년 봄,

세종문화회관이 화려하게 문을 열던 해였다.

그곳은 서울의 고등학생들의 핫플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그녀를 마주쳤다.

길게 땋은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

촉촉한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평범했던 소년의 심장은 요동쳤다.


그녀는 예고에서 붓을 든 동갑내기였다.

지금의 아내 역시 미술을 전공했으니,

어쩌면 나는 붓 끝에서 흐르는 물감 향기에

영원히 취해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지 모르겠다.


만난 지 100일째 날,

그녀는 나에게 패널을 건넸다.

김춘수의 「꽃」이 그녀의 손길로 피어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시구와 함께 핀 꽃잎들은 소년의 마음을 영원히 물들였다.

그 패널은 지금도 내 머릿속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유일한 유물이다.



옛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그녀가 준 시화패널



만난 지 1년쯤 되던 어느 비 오는 토요일 아침,

그녀의 전화는 긴박했다.

만나자마자 쥐어준 것은 도장과 800만 원이 찍힌 통장이었다.

"도망가자."

그녀의 눈에는 물감이 아닌 눈물이 맴돌았다.

당시 그 돈은 어마어마했고,

통장은 당시 모기업 오너로 잘 알려진 그녀의 아버지 것이었다.


고작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범생이의 상식이 용기보다 컸다.

아니 무서웠다.

그 후로 그녀는 연락 두절이 되었다.

부산 어딘가에서 어떤 남자와

살고 있다는 소문만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 아파트 시세표



도전적인 미소로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뛰어내리던 소녀는,

내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하며 가장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버나드 쇼의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버스와 여자는 또 온다."

하지만 그 후로 온 버스들은 모두 그녀가 아니었다.


48년 세월이 빗물처럼 땅속으로 스며든 지금도,

장마철이면 그날의 향기가 밀려온다.

세종문화회관 앞 젖은 계단의 습기,

그녀의 급한 숨소리,

통장 찍힌 숫자의 무게.

아련함이란 이렇듯 시간의 틈새를 타고 스며드는 빗방울이다.

머리카락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지지만,

피부는 그 접촉을 기억한다.





현숙아.

그 비 오는 날,

내가 용기 내어 네 손을 잡았다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네가 선물한 「꽃」의 시구처럼,

나는 아직도 그날의 너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네가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이 진실이길,

네 붓끝에 항상 해가 비추길.

비 그친 뒤 개인 하늘에 뜨는 무지개처럼,

우리 미완의 봄은 영원히 아련하게 걸려 있으리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비가 내릴 때마다, 김춘수의 시가 네 목소리로 내 귓가에 맴돈다.

첫사랑이 남긴 빗자국은 평생 마르지 않는다.


Once there was a love.

Deeper than any ocean

Once there was a love

filled with such devotion.

It was yours and mine.

한 때 어느 바다보다도 깊은 사랑이 있었어

한 때 헌신으로 가득한 사랑이 있었어

그건 당신과 나의 사랑이었어


To hold and cherish

and to keep for a life time.

Then you went away

on that lonely day

일생을 통하여 소중히 간직하고 지켜왔는데

그 외롭던 날 당신은 떠나버렸지


Once there was a love

Now I don't know how I can go on

Some how I feel so all alone.

Wondering where I've gone wrong...


https://youtu.be/xrJP7tgcaJA?si=eRNvGDplAkOFwx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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