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오랜만에 영화를 보면서,
바둑돌 부딪히는 소리가 마음의 공명을 깨웠다.
바둑판의 흑백도 모르는 나에게 <승부>(2025)는
놀랍게도 수(手)보다 인간의 온기를 전했다.
이병헌이 연기한 조훈현 9단이 유아인의 이창호 9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품는 아련한 자부심과 경이로움,
그리고 아픈 이별이 교차했다.
"바둑이라는 게 참 이상해.
돌을 놓고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막상 놓기가 힘이 들어."
이 한마디에 스승의 모든 고뇌가 응축되었다.
승패의 신(神)으로 불리던 그가 제자에게 연패하는 좌절은
단순한 경기 패배가 아니라 세대교체의 무게로 다가왔다.
은퇴한 나의 모습이 보였다.
조훈현기사와 다른 것은 변변한 후계자(?) 없이
은퇴한 것이다.
영화는 조훈현이 "최고의 자리를 제자에게 내주며 겪는 감정"에 집중한다.
기술적 묘사보다 두 거물의 정신적 고통과 치유 과정이 앞섰다.
조훈현기사에게 라이벌 기사가 내뱉는 "견뎌내는 법"의 교훈은
바둑판을 넘어 인생의 본질을 찌른다.
"그렇게 견디다가 이기는 거예요.
쓰라린 상처에 진물이 나고 딱지가 내려앉고 새살이 돋고...
참다 보면 한 번은 기회가 오거든."
이 대사에서 바둑은 승부의 기술이 아니라
고통의 열매를 기다리는 인내의 수행으로 재해석된다.
상처와 재생의 순환은 바둑판 위에서도,
인생길에서도 변치 않는 진리임을 깨닫게 했다.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조훈현기사의 스승인 세고에 켄사쿠에게서 물려받은 바둑판이
다시 이창호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뭇결에 새겨진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게 바둑이다"
라는 스승의 글귀 아래,
조훈현이 덧붙인 "바둑은 자신과의 싸움이다"가 중첩되어 있었다.
이 이중각(二重刻)은 바둑의 본질을 관통하며
세대를 잇는 정신적 유산을 상징했다.
돌 한 점 한 점에 스며든 고뇌의 흔적이 제자에게 건네질 때,
비로소 승패는 유한(有限)하지만 인간의 끈기는 무한(無限)함을 보여주었다.
물려받은 자가 이제 물려주는 자로 서는 과정에서 영화는 완결된 서사를 얻는다.
검은 돌과 흰 돌이 만나 빚는 무수한 형태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치유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스승은 제자를 이기도록 키웠고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마주했다.
승부의 끝은 이김도 짐도 아닌
돌을 주고받은 두 손의 온도에 서려 있었다.
영화는 바둑을 매개로 한 치열한 성장 이야기이자,
세대를 관통하는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조훈현의 바둑판에 새겨진 두 문장은 삶의 양극(兩極)을 가리킨다.
답이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과 그럼에도 답을 찾는 용기.
이 대립적 통일 속에서 우리 모두는 매일의 작은 승부를 견뎌내고 있다.
인생이란,
패배의 돌무더기에 피어나는 한 송이 승리꽃을 기다리는 여정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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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부터 현재까지 77년간 집계된 국내·국제 바둑 대회 타이틀 개수는 모두 1009개에 달한다. 이 중 조훈현 9단이 162개로 가장 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조 9단의 제자 이창호 9단이 142개의 타이틀을 획득.
인공지능(AI) 알파고를 상대로 유일하게 공식전 승리를 거둔 이세돌 9단은 50개의 타이틀로 3위에 올라있다. 현 대한민국 바둑 랭킹 1위이자, 세계 1인자인 '반상의 제왕' 신진서 9단이 40개의 타이틀로 뒤를 잇고 있다. 신 9단은 은퇴자와 시니어를 제외한 한참 활동하는 현역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타이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압도적으로 많은 타이틀을 보유한 조훈현·이창호 9단의 경우 당시 화폐 가치 등을 감안할 때, 역대급 상금을 획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뒤를 이어 타이틀 기록 상위권에 포진하고 있는 이세돌(96억원), 신진서(92억원), 박정환(100억원) 9단 등도 자신들이 획득한 타이틀 수에 걸맞게 90억~100억 원대의 고액 상금을 수령했다. - CBS노컷뉴스 기사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