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점의 서사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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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사빌(1970~ )은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 주름잡는 10인의 여성 작가 중 한명이다.

역시 YBA 그룹의 대표작가다.

사람 키보다 큰 거대한 캔버스에 육중한 살덩어리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여성 누드로 일찌감치

세계적인 컬렉터 찰스 사치의 눈도장을 받았다.


고전적인 누드화 문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주관적인 미감으로

비만 여성을 그리는 영국 구상주의 회화작가 루시안 프로이드(Lucian Freud)와

종종 비견되기도 한다.



Juncture.jpg < Juncture >



한 폭의 캔버스 위로 드러난 살결은 단순한 피부가 아니다.

두터운 유화 물감이 쌓여 육체의 무게와 숨결을 내뿜는다.

영국 화가 제니 사빌의 작품 앞에서 관객은 생명의 원초적 진동을 마주한다.

그녀는 육체를 해부학적 대상이 아닌,

정체성과 취약성이 교차하는 장으로 재정의한다.


비평가 마크 스티븐스가 인용한 윌렘 드 쿠닝의 말대로,

“유화가 발명된 이유는 바로 살점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사빌은 이 선언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며,

살이 압축하는 역사와 감정의 층위를 파헤친다.


그의 붓끝은 전통적 미학이 외면한 몸을 포착한다.

비대칭의 복부, 출산의 흔적, 거대한 허벅지-

이미지들은 사회가 ‘추하다’ 규정한 신체 부위를

당당히 화폭 중심에 올린다.

"Hyphen"(1999)과 같은 작품에서 살은 경계이자 연결점이 된다.



20250610_204952.jpg "Hyphen"(1999)



두 개의 신체가 하나로 융합된 형상은

개인의 경계가 해체되는 모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성별과 정체성의 유동성을 탐구한다.

이는 단순한 형상 재현을 넘어,

몸이 겪는 정치적·사회적 압력에 대한 성찰이다.



20250610_205547.jpg 제니세빌, <받쳐져 있는>, 1992



모성에 대한 그녀의 접근은 서양 미술사의 성모자(聖母子) 도상을 의식적으로 재해석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우아한 성모상과 달리,

사빌이 그린 어머니는 피로와 긴장이 묻어 있다.

아이를 안은 팔의 근육이 긴장하고, 몸은 기울어져 있다.


스티븐스는 “포스트모더니스트처럼 모성을 풍자하지 않으면서도,

다 빈치가 놓친 어머니됨의 진실을 포착한다”고 평한다.

이는 그녀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내밀한 통찰—경험에서 우러난 진실—때문이다.

유화 물감과 숯의 선이 교차하는 화면은 생물학적 본능과 일상의 고통이 공존하는 모성의 이중성을 직조한다.



20250610_210019.jpg <지렛대 받침>, 1998~1999



새빌의 그림이 표출하고 있는 혐오의 미학은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경험에 근거한다.

그림 속 혐오스러울 만큼 비대한 여성의 몸은 내부로부터

자신을 위협하는 망령과도 같다. 

다시 말해 여성의 상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새빌은 여성의 몸 아브젝트를 물질화함으로써 드러낸다.



jenny-saville_shift_AID279453.jpg < Shift >



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방식과 그 몸이

실제로 타인에게 인지되는 방식 간의 차이, 

말하자면 살아 있는 몸과 이상화된 몸 사이의 부조화 내지

괴리를 실감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새빌이 구현하고 있는 혐오스러운 몸들은

역겨운 몸이 아니라 마치 역겨운 것처럼 인식되어온, 

살아있는 몸들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Reflective_Flesh.jpg < Reflective Flesh >



"살은 기억한다. 상처와 탄생의 역사를."


사빌의 화폭은 결국 ‘가시성의 투쟁’이다.

그녀의 유화는 살점을 통해 우리가 외면해온 것들

-성별, 권력, 취약성-을 가시화한다.



2008_CKS_07565_0040_000(032646).jpg < Figure 11.23 >



두꺼운 물감 아래로 맥동하는 생명력은 회화 매체 자체가

신체성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비록 시장은 그녀의 몸짓에 제 값을 쳐주지 않을지라도,

각 그림이 건네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누구의 몸이 미술사에 기록될 자격이 있는가?

그녀의 답은 캔버스 위로 흐르는 붉은 유성액처럼 짙고 열렬하다.



Shadow_Head.jpg < Shadow He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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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RK8A9JJpPI?si=YxnDFW_NK13ny9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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