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견디는 마음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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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위에 번진 먹빛은 조용하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 천둥 같은 외침이 숨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주한 "세한도(歲寒圖)"는

처음엔 한없이 소박하고 고요한 풍경처럼 보였다.



image01.jpg 세한도



쓸쓸한 초가와 푸른 잣나무 몇 그루.

겨울 속의 나무는 움직이지 않지만, 보는 이의 가슴은 서서히 떨리기 시작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이 그림을 제주 유배 시절에 그렸다.

세상이 등을 돌리고, 벼슬도 끊기고, 모든 것이 스러져가던 때.

그러나 그 혹독한 겨울에도 한 사람만은 그를 잊지 않았다.

제자 이상적.


"세한도"는 그 제자의 변함없는 마음에 대한 감사이자,

그 겨울을 견디는 자의 고백이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를 안다고 했다.

추사는 그 말을 그림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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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나무,

바로 그 나무에 제자의 충성과 의리를 겹쳐 그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림에서 제자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추사의 성찰과 다짐을 보았다.

눈 덮인 세상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푸름처럼,

그는 자신의 학문과 정신을 굽히지 않았다.

겉으론 유배된 관료였지만, 마음속엔 한 나라가 깃든 선비였다.

묵은지처럼 깊은 그 선의 흐름,

붓끝이 머문 자리마다 조선 지식인의 고고한 자존이 서려 있다.

화려하지 않다.



김정희 초상(사진=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그 단정한 담백함 속에 세속을 넘는 기품이 있다.

나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만감이 교차했다.

자리에 있을 땐 온갖 아부를 일삼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인간관계의 허망함에 한숨이 나온다.

세한도의 한숨 소리도 들린다.


우리 시대는 눈보다 더 매서운 속도와 바람에 휩싸여 있다.

사람의 마음도, 관계도 쉽게 식고 흔들린다.

그런 시대에 "세한도"는 오래된 벽화처럼 다가온다.

‘끝까지 푸르게 남아 있는 것’의 의미를 조용히 묻는다.

추사는 말이 없었다.


다만 붓으로, 그리고 나무로 말했을 뿐이다.

그 침묵 속의 붓글씨와 풍경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어느 겨울을 견디고 있느냐.

그리고 그 속에서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세한을 지나야 비로소 봄을 만난다.

그는 겨울의 정점에서 이 그림을 남겼고,

우리는 그 세한을 지나며 다시 그를 만난다.


푸름이 더 빛나는 계절은, 바로 겨울이라는 것을.



김정희 ‘난맹첩’의 ‘국향군자’



6666.jpg 김정희 필 불이선란도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jpeg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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