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 따라 살아보기
나는 오래전 6년 만에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도 일종의 라이센스라고 생각하고 이겨냈다.
그러나 빛바랜 학위증은 이제 새로운 세대에게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
어느날, 딸아이가 그 길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왜 한숨만 나오는 걸까?
비 오는 저녁,
고대 제나라 궁궐 부엌에서 한 남자가 소 한 마리를 해체하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며 무릎으로 밀어붙이는
동작마다 살점이 갈라지는 소리,
칼끝이 뼈를 스치는 소리가 마치 우아한 전통 춤사위처럼
유연한 흐름을 보였다.
문혜군이 우연히 목격한 이 광경은 왕을 황홀케 했다.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는가?"
포정은 칼을 내려놓았다.
칼날에는 피 한 방울 맺히지 않았고,
19년 수천 마리의 소를 잔해 했음에도 숫돌에서 막 갈아낸 것처럼 번뜩였다.
"처음엔 소가 온전한 덩어리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 뒤엔 근육의 결을 보게 되었고,
십 년이 지나자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게 되었지요."
그의 말은 비를 가르는 천둥 같았다.
"이제는 칼을 쥔 손이 아니라 정신이 움직입니다.
뼈와 살 사이의 틈새로 칼이 저절로 흘러가죠."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갈았다.
뼈를 억지로 가르려다 칼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장인조차 해마다 새 칼이 필요했다.
그러나 포정의 칼날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두께 없는 칼날이 살과 뼈 사이의 '유여(有餘)'-
그 넉넉한 틈새를 찾아 들어갈 때,
금속은 살같이 유연해졌다.
그는 살이 뼈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라 표현했다.
자연의 이치가 그 안에 스민 소리였다.
"이 사람은 백정이 아니라 도인(道人)이로다!"
문혜군이 탄성과 함께 깨달은 선언이다.
신분은 천했으나 그의 정신은 하늘과 통했다.
고대의 백정이 하루아침에 아홉 마리 소를 잡아도
칼이 무디지 않았다는 전설도 놀랍다.
그러나 포정의 기술은 차원이 달랐다.
그는 소를 '잡는' 것이 아니라 '풀어냈다'.
마치 대장장이가 쇠를 불에 맞기보다 그 본성에 순응하듯,
목공이 나무 결을 거스르지 않듯-
포정은 소의 천성(天性)과 하나 되어 그 안에 내재한 길을 따라갔다.
현대의 박사 학위는 이론의 정점이다.
그러나 빵을 만드는 이치를 화학 공식으로 해설하는 박사가,
중학교도 못 나온 빵 장인의 손에서 나오는 구수한 향을 재현할 수 있을까?
학문은 지식을 전달하지만,
도(道)는 몸으로 깨치는 것이다.
수만 번 반복된 칼질이 근육에 새기는 각성,
실패의 상처가 영혼에 각인하는 통찰 - 이것이 체득(體得)이다.
부엌에서 소를 해체하는 일에도
도가 스며들 수 있음을 포정이 증명했다.
차를 우려내는 다완(茶碗)의 온도에서,
배 한 척을 조립할 때 나무 결을 읽는 손끝에서,
심지어 빗자루로 마당을 쓸 때 먼지 하나 없는 각도에서
도는 계급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마음을 가린다.
대개의 부모들은 자식에게 박사 학위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염원은 '잘 사는 것'이 아닐까?
포정의 칼날이 19년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은 '간절함'에 있었다.
그는 근육과 뼈가 얽힌 곳에 닥칠 때마다
"두려워하며 경계했다"라고 고백한다.
위기는 가장 예리한 집중을 낳고,
집중은 틈새를 보는 안목을 연다.
학위는 벽에 걸리는 증명서지만,
도(道)는 살아 움직이는 호흡이다.
포정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언어의 한계다.
"진정한 이치는 말로 전할 수 없고, 문자로 깨칠 수 없다."
그의 해우술(解牛術)은 스승의 구전이 아닌,
스스로의 정신이 천 개의 소를 관통하며 터득한 길이었다.
마치 물이 흐르는 방향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흐르게 하듯,
도는 가르침이 아니라 깨침이다.
포정의 칼은 창조적 체득의 길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의 안에 잠든 포정(庖丁)을 깨울 때
학위보다 먼저 손에 잡히는 것은 내 그림자를 가르는 칼날일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이다.
"도(道)는 답이 아니라
칼끝이 살짝 빗나갈 때
손끝에서 멈추는
그 고요함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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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Kg5Jdfw7vg?si=OKdfapv6ZamEOf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