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색, 침묵과 울림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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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나는 말이 사라지는 풍경 앞에 서 있었다.

그곳은 풍경이기도 하고,

감정이기도 하며,

음악 같기도 한 무언가였다.



1.jpg ‘우주’는 김환기의 미국 뉴욕 시절 주치의 김마태 부부가 40년 넘게 소장한 그림이었다. 김환기를 마지막 병상까지 보살핀 후원자가 구입해 애지중지한 그림이라는 사연이 있다.



김환기의 "우주"

132억 원이라는 숫자가 먼저 다가왔지만,

그 압도적인 값어치보다 먼저 나를 흔든 것은

수천 개의 점이 만들어낸 고요한 우주의 숨결이었다.


〈우주〉는 밤하늘처럼 깊은 남청색 바탕 위에

수없이 찍힌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점 하나하나가 별이 되고, 마음이 되고, 어느 기억의 파편이 된다.


김환기는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침묵을 수없이 쌓아 올려 만든 듯했다.

그는 말보다 점을 믿었고,

설명보다 감응을 택했다.

처음에는 어지럽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면 점들 사이에 흐름이 느껴진다.

무질서해 보이던 점들이

보이지 않는 리듬을 따라 숨 쉬고 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



그건 마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과도 같다.

김환기는 자연을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바다와 하늘, 새벽의 별빛과 섬의 바람을 그리워하며

서울과 뉴욕 사이를 떠돌았다.

그러나 그 그리움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감각의 밀도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우주〉는 단지 별을 닮은 그림이 아니라,

그리움 그 자체가 된 그림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묻는다.

무엇이 한 점을, 그리고 그 수천 개의 점을

억 단위의 예술로 만들었을까.

값비싼 안료도, 복잡한 기법도 아니다.

그건 아마,

지워지지 않는 침묵의 무게,

시간과의 오랜 대화,

그리고 한 예술가가 평생을 걸쳐 도달한 ‘내면의 우주’ 때문일 것이다.


김환기는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외로움과 함께 걸었고,

그 안에서 우주의 언어를 배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결코 소란스럽지 않다.

거대한 침묵으로 우리를 감싼다.

그리고 그 침묵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발견하게 된다.


〈우주〉 앞에선 나는, 마치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말없이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순간.

김환기의 점 하나가 내 가슴에도 새겨지는 느낌.

우주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고요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어떤 진실이 아닐까.

그는 별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삶의 깊이’를 그리려 했다.


그 점들은, 결국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고독이자,

그 고독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시적 선언이다.

김환기의 〈우주〉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가장 작은 점이, 가장 큰 울림을 낳는다.”

그 울림은 아직도 내 안에서 잔잔히 퍼지고 있다.



운월 (1963).jpg <운월> (1963)



봄의 소리 〈4 - I -1966〉.jpg 봄의 소리 〈4 - I -1966〉



붉은 점화 〈03 - II -72 #220〉.jpg 붉은 점화 〈03 - II -72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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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RK8A9JJpPI?si=NFY7Inj0KekqxP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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